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인터넷에 보면 ‘당당한 노년을 위한 골드인생 3 원칙’이란 게 있다. 3원칙은 ‘하자’ ‘주자’ ‘배우자’, ‘하자’는 뭐든지 하면서 노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고, ‘주자’는 봉사하고 기부하며 베풀라는 것이며, ‘배우자’는 나이 들어 뭘 배워 그러지 말고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배워야 당당한 골드인생을 산다는 거다. 이 3원칙은 노인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도 도움이 되는 교훈, 기왕이면 골드인생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당당한 골드인생, 예수님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문이다. 예수님이 하신 기록된 기도로는 가장 긴 기도다. 그런데 기도하는 모습과 내용이 너무 당당하고 아름다우시다, 1절과 5절에 자신을 위한 간구도 있지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기도, 이름하여 ‘대제사장적 기도’, 이렇게 부르는 이유를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기도와 일치하는 장엄한 헌신을 주목하게 만들며,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무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를 향한 자세를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라 했다.

이 기도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18:1-3), 그렇다면 체포당하기 직전에 드린 기도라는 말이다. 체포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심문과 모욕과 온갖 가혹행위를 다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서 결국 그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시는 이 일련의 일들이 숨가쁘게 진행되기 직전에 드린 기도, 한 마디로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드린 기도다.

그렇다면 분위기는 ‘우울’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이 기도 속에 분노, 원한, 탄식, 불안, 절망의 단어가 없다. 바로 앞에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16:33)고 확언하신 분답게 확신이 넘친다. 좌절감이 아니라 소망과 즐거움의 무드다. 반복되는 단어를 보라. ‘영화’(1,4,5절), ‘영생’(2,3절), ‘영광’(10,22,24절), ‘기쁨’(13절), ‘진리’(17,19절), ‘사랑’(23,24,26절)… 그 중에 특히 많이 반복된 말이 ‘영화롭게 하심’과 ‘영광’이다. 그래서 1절의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예수님은 ‘때’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하셨다(1절). 2장에서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2:4), 가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뭔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7장에서도,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7:6), 초막절에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정계에 진출해보라(?)는 식의 요구를 할 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12장에서는 때에 관한 말씀이 바뀐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27), 16장에서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16:32), 드디어 그 때가 임박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시작할 때는 그때가 되었음을 안다고 하셨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자기 때가 있고, 그 때가 왔다는 말씀이다. 맞다. 사람은 다 자기 때가 있다(전3:1-11).

문제는 그때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때를 안다면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상황이든 대처가 가능하겠지만 그때를 모른다는 것, 이게 인간의 불행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때를 아신다.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아시고, 나서야 할 때인지, 물러서야 할 때인지, 죽을 때인지 다 아신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때를 아셨다. 영원 전에 작정하신 때인데 드디어 그때가 왔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십자가에 달려 고난과 치욕과 죽음을 당하실 때다. 그렇다면 실패와 패배의 순간, 그리고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때인데 기도를 보면 피할 생각이 없으시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던 때를 맞는 듯한 분위기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로 삼으셨다. 너무 당당하시다. 때에 맞는 삶, 때를 놓치지 않는 삶, 예수님은 골드인생을 사셨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요한은 예수님의 고별설교 후의 기도자세를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라고 했다(1절). 박윤선 주석에 보면 이 기도자세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거리낌 없는 예수님의 특이한 기도자세라고 했다. 눅 18장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자세와 대조적이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세리의 기도자세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죄인의 겸손’을 나타냈다면 예수님의 기도자세는 하나님 앞에 너무도 뚜렷한 ‘사랑의 관계’를 나타냈다.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여”(Father), 심플하다. 부모를 대하는 자녀의 부름, 어떤 호칭보다도 더 친밀감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그리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고 기도하셨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십자가를 실패, 고난, 수치로 여긴다면 할 수 없는 기도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영광의 수단일 뿐이었다는 의미, 마치 때에 맞지 않는 기도처럼 보인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 때에 맞는 기도라면 “아버지, 최선을 다했지만 가슴 아프게 이 세상에서 이렇게 수치와 모욕을 당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만이라도 저를 영화롭게 하셔서 저를 위로하고 보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탄원 기도여야 한다. 그런데 아니다. 사역과 그 결과에 대한 당신 스스로의 평가가 근본적으로 다르시다. 맡기신 모든 사명을 완수한 골드인생, 그래서 이제 곧 십자가를 지더라도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고 골드인생의 절정이요 모든 지상사역의 마무리라는 확신이 넘친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감격과 기쁨과 감사의 기도다.

이 기도는 위대한 승리와 영광의 찬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심오한 해석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히 선하신 뜻의 은혜로운 계시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명령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무엇을 영광으로 삼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세상 영광을 추구하셨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기도다.

예수님도 그러셨지만 성경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다룬다. 그 이유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죽음 또는 대속의 희생으로 본다면 그것은 왜곡된 영광이 될 수 있지만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것으로 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십자가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시간의 문’과 같은 것, 시간의 문이 십자가를 통해 열리는 거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라고 표현하지 않고 ‘들림받는다’(3:14,12:34)고 표현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말기에 있었던 일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 악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방에서 불뱀에 물려 죽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때 모세가 중보기도하고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고 쳐다보는 사람은 낫게 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장난하냐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경험을 의지해 약을 찾았을 거다. 그러나 그들은 다 죽었고, 믿고 쳐다본 사람은 살았다. 반응이 중요하다. 믿고 쳐다봐야 생명을 얻는다.

‘들여야 하리니’, 십자가가 문자적으로 지표에서 들리는 것, 예수님의 승리가 암시된 영광 받을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뻐하신다.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과 영광으로 여기셨다. 그렇다. 십자가는 대속의 희생이 치러지는 장소 개념보다 예수님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시는 통로였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통로! 그래서 세상이 이겼다고 기뻐할 때 골드인생을 사신 주님은 “내가 이겼다”고 승리를 선언하고, 제자들이 슬퍼하고 근심할 때 기뻐하고 영광으로 여기며 감격하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성령 받고 난 후에는 그들도 같은 시각을 갖게 된다. 그들의 눈에도 십자가가 영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골드인생으로 바뀐다.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기쁨이 죽음의 권세를 삼킨 거다. 죽음이 영광인 자들, 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영생의 지식을 갖고

고려 말쯤 있었던 풍습 중에 고려장이라는 게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나이 많은 부모를 깊은 산중에 버리는 거다. 어느 아들도 늙은 어머니를 더 이상 봉양하지 못하고 지게에 어머니를 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어머니가 계속 꽃나무 가지를 꺾는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소리가 자꾸 들리자 아들이 묻는다. “어머니 왜 나뭇가지를 자꾸 꺾어요?” “표시하려고 그런다.” “돌아갈 걱정 때문에요?” “아니, 네가 돌아갈 때 길을 잃어버릴까봐 표시해 두는 거야”

이게 부모 마음이다. 그저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생 얻기를 기도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주님의 기도지만 이 3절에서 영생이 뭔가 하는 것이 설명된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다. 알아야 생명 있다는 것, 계속 강조한 대로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 동의어다. 하나님을 알고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 ‘영생’이다. 영원한 생명, 죽지 않는 생명, 이 영생은 아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얻는다. 지식이 중요하다. 이 지식은 공부나 정보습득으로 얻는 지식이 아니라 ‘믿음’을 의미한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강조되던 지식, 이건 믿음을 강조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호세아서를 보라.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4: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랐나? 아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며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호소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하나님과 바알 우상을 구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말씀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14: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예수님은 순종 없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순종을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역사학자 김동길 박사가 크리스천 입장에서 쓴 『나이 듦이 고맙다』는 책에 보면 “비록 부침(浮沈) 많은 인생이지만, 사랑하는 내 주 그리스도를 뵈올 날을 기다리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백발의 노인들이 많아질 때, 조국의 저녁 하늘은 더욱 아름다운 황혼으로 물들 것”이라 했다.

믿자. 힘써 믿자. 그래야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눈이 달라지는 골드인생을 살 수 있다. 그래야 생명을 얻는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셨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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