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덱거(Heidegger)가 ‘인간은 던져진 생을 산다’고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 상황 가운데 던져져서 그 상황으로 인해 고통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인생살이는 기쁨보다 슬픔이나 괴로움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지구촌에는 사는 것이 힘겨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성경도 인생은 헛된 것이요 허무한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는 인생을 ‘마르는 풀’과 같다(시90:5-6)고 했고, 야고보는 인생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약4:14)에 비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한다. “항상 기뻐하라...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라고 했다.
본문에도 기쁨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 ‘세상이 누릴 기쁨’과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은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21절), ‘사람 난 기쁨’, ‘출산의 기쁨’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절), ‘다시 만날 기쁨’을 말씀하시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라 하셨다.
20절부터 22절까지, 3절에 ‘근심’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오고, ‘기쁨’이라는 단어가 5번 나온다. 점점 커지던 제자들의 근심을 반영한 숫자, 그리고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확신시키시려는 주님의 강한 의지가 담긴 숫자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 앞부분에서는 ‘세상은 기뻐하고 제자들은 근심할 것’이라고 하셨지만 뒷부분에서는 ‘제자들의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조금 있으면 누릴 기쁨
본문에 여기서만 집중적으로 반복되는 말이 있다. ‘조금 있으면’, 16절부터 19절까지 4절에서 무려 7번이나 반복된다. ‘조금 있으면’, ‘조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미크론’(μικρὸν). 작다는 뜻이다. 반대말은 우리가 잘 아는 ‘메가’(μέγα)라는 단어, 메가는 크다는 뜻, 메가 처치, 메가 스토어(대형 매장), 메가톤급...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근래에 몇 년간 크게 유행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오미크론(oμικρὸν)이었다. 미크론 앞에 오(0)가 합성된 말, 작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거다. 반대로 헬라어 마지막 알파벳인 오메가(ωμέγα)는 오미크론에 대응하는 개념, 크다는 의미를 갖는다.
미크론, 조금 있으면!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절), ‘조금 있으면’이 두 번 사용되었는데 혼란스러운 말씀이다.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이해되는데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은 난해하다. 학자들은 성령의 인격이나 역사 안에서 다시 오신다는 뜻인지, 아니면 부활 이후의 직접적인 현현인지, 또 아니면 승천과 그 이후에 있을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왕국의 도래를 뜻하는 건지 모호하다는 반응들이다.
여하튼 조금 있으면 큰 어려움이 닥치겠지만 또 조금 있으면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 둘 다 똑같이 ‘조금 있으면’이라 했기에 죽음도 금방 일어날 일이고, 다시 보리라는 말씀도 곧 일어날 일로 받아들일 만한 것,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아리송한 말씀 때문에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임박한 종말론’(Imminent Eschatology)이라 한다.
바울도 이 임박한 종말론에 근거해서 로마의 대도시 위주로 땅끝까지 그야말로 바람처럼, 불처럼 선교했다. 결혼이나 직업이나 조직에 신경 쓰지 않고, 복음 증거 외 다른 모든 것을 다 주님 재림 이후로 미루었다. “조금만 참으면 주님이 오셔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란 태도였다. 국가나 정치 문제나 노예제도에 대한 태도도 그랬다. “세금 낼 것 내고 조용히 살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노예제도?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곧 좋은 날 올 거야. 재산 빼앗기고 억울한 일 당해도 조금만 참아. 그날이 곧 오는데 그 날이 오면 다 풀릴 거야.”
문제는 주님이 오시지 않은 거다. 부활이 있기는 했지만 제자들만 경험한 것, 그 후 성도들은 ‘조금 있으면’ 뵐 줄 알았는데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오시지 않았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오시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다양한 해명이 주어졌다. 대표적으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는 말씀, “더디다고? No! 주님의 시간으로는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베드로식으로 보면 이제 겨우 이틀 지났을 뿐 아닌가?” 선교의 문제로 해명하기도 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기에 참고 계신다는 것, 그러니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그런데 사도 요한의 논조는 좀 다르다. ‘이미 주님은 오셨다’는 거다. 부활과 임마누엘, 보혜사 성령이 바로 그 증거라는 거다. 예수께서 고별설교에서 성령을 계속 당신을 대신하는 존재처럼 말씀하신 것도 그런 관점을 갖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1-3), “보았고 만졌고 지금도 사귐 가운데 있다”는 것, ‘주님이 이미 오셨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통칭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또는 현재적 종말론(Present Eschatology)이라 한다. 어떤 해석이 옳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와 ‘아직’(here but not yet) 그 사이에 있다. 신학적 견해보다 고난을 통과하면 얻는 기쁨에 더 집중하면 좋겠다. 현재의 고난보다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그게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는 비결이다. 기억하라. 고비를 넘기면 기쁨이 기다린다.
이 기쁨은 우리가 언제나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 재림 때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겠지만 당장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성경은 말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절). 신랑과 신부의 허니문 기간의 기쁨 같은 기쁨, 성령 안에서 고양된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게 바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이다.
그렇다. 기쁨, 먼 미래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경우 지금은 비록 내적 고통과 비탄, 극심한 두려움과 슬픔이지만 조금만 있으면, 조금만 있으면 그것들이 곧 큰 기쁨과 환희로 바뀐다.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불안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제자들의 내면에 기쁨과 환희로의 일대 국면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 그 사건이 바로 부활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란 것, 지금까지 역사상 인류를 억눌러왔던 죄와 사망이 정복된다. 주님의 대속적 죽음과 연합하기만 하면 완전한 죄 사함, 영원한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조금만 있으면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도 이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 기쁨은 신앙인의 표지, 그렇다면 이 기쁨은 많이 그리고 생생하게 누려야 한다.
차원이 다른 기쁨
제자들이 누릴 기쁨은 차원이 다른 기쁨이다. 생각해보라. 세상과 교회가 잘 맞나? 안 맞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관과 우리의 가치관이 다르고, 서로의 시간도 다르고 기쁨도 다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20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22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할 것이다. 근심 정도가 아니라 숨 막히는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반면에 세상은 완전 축제 분위기, 자기들이 이겼다고 난리날 거다.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얘기는 달라질 거다. 그때는 제자들이 날 것 같은 기쁨을 누리겠지만 세상은 절대 그 기쁨을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기쁨은커녕 이해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끝이 아니라 2천 년이 지났는데도 교회가 버젓이 존재한다. 신자들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며 기뻐한다. 사도 바울은 이걸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한 마디로 세상과 신자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산다는 거다.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이라는 세상 가치로 따지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라는 참 생명, 진리를 알지 못하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 이 기쁨은 밭에 보화를 감추고 있는 농부의 기쁨 같은 거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다. 전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다.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봐 보화를 바로 캐내지는 못하지만 너무 기쁘고 마음이 부요하다. 세상이 허름한 밭이라고 조롱할지라도 농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밭에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가나 부자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다. 돈 씀씀이도 여유롭다. 밭에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의 기쁨이다.
바울은 좀 다른 식으로 표현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가장 고상한 것을 소유하고 보니 다른 것은 다 가치가 없다는 것, 그래서 해로운 것, 배설물 취급했다는 것, 우리는 이 말씀에서 ‘내게 유익하던 것들’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가치없는 것들을 해롭게 여기고 버렸다는 고백이 아니다.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 세상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 지식이나 명예나 재물이나 안정 같은 것들, 이런 걸 다 우습게 여겼다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차원이 다른 기쁨, 수준이 다른 기쁨 때문이다. 우리도 이런 기쁨을 누려야 한다.
고난을 이기고 누리는 기쁨
제자들이 누릴 기쁨은 고난을 이기고 누리는 기쁨, 빼앗을 자가 없는 기쁨이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21절), 끔찍한 십자가가 부활에 이르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거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 무통 주사를 맞는 시대라 할지라도 가장 큰 고통 아닌가? 그런데 이 과정을 통과하면 생명 탄생, 아기가 나오는 순간 또 그 생명이 자라고 함께 사랑을 나눌 때가 되면 더 이상 이전의 고통이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 큰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생에도 고난이 있고 역사에도 고난이 있다. 그냥 세상이나 자연의 눈으로 보면 힘이 없어서, 운이 없어서 당하는 고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고난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성장통을 참는다. 아니 오히려 많이 아픔만큼 성장하고 변화하기에 이겨낸다. 신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의 법칙도 마찬가지, 자기 인생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그 분야에서 거목이 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악성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유난히 고난이 많았다. 32세 때 쓴 유서를 보면 “완전 귀머거리, 이제는 희망이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하는 청각을 잃은 것, 절망이다.··· 잠시 후면 나의 삶을 마감할 것... 아, 불운한 존재!”, 다행히 베토벤은 목숨을 끊지 않고 기도했다. 그리고 유서 말미에 “마지막으로 순수한 기쁨의 날을 허락하소서!”라고 쓰고 다시 힘을 냈다. 그리고 21년 후 비엔나의 카른터 극장에서 ‘기쁨의 송시’ ‘환희의 송시’라는 9번 교향곡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다. 거기에 포함된 불후의 명작 ‘합창’은 우리가 잘 아는 곡이 들어있다. 다이크 목사님이 작사해서 찬송 64장이다.
인생을 기쁨의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작곡할 수 없는 위대한 걸작 9번 교향곡, 베토벤에게 있어 삶은 더 이상 암울한 것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삶을 보는 눈이 바뀐 것, 그게 그로 하여금 또 한 번의 인생 무대를 만들게 했다.
고난 속에 뜻이 있고, 고난 속에 생명 있다. 성경은 말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22절), 고난이 있더라도 희망을 갖자. 고난 속에서 진주가 나오고, 고난 속에서 생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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