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예수님의 고별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사랑’인데 또 하나의 반복적인 주제는 ‘성령’이다. 14장부터 16장 사이에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이 다섯 차례나 나온다(14:16-18, 14:26-27, 15:26-27, 16:1-11, 16:13-15). 사랑과 성령, 둘 다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룬 주제들이다.

예수님은 박해가 있어도 당신의 사랑이 끝없는 사랑임을 세족식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고, 또 서로 사랑하라고, 이게 꼭 지켜야 할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떠나더라도 그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을 거듭 말씀하신다. 십자가도 사랑이고, 처소를 예비하는 것도 사랑, 이 사랑이 근심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이 볼 때 사랑은 진리였다.

성령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사랑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 14장에서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비적 계시가 성령께서 오신 궁극적 목적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을 잘 지켜 제자들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에 쌓인 제자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근심할 이유가 없다며 주신 말씀이다. 그 가운데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절)고 하셨는데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어떤 일이라고 하셨나?

세상을 책망하실 것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실 성령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셨다(14:26). 이는 요한의 독특한 표현이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곁에서’라는 뜻의 ‘파라’(παρά)와 ‘말하다’라는 뜻의 ‘클레토스’(κλητος)의 합성어,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인데 영어 번역본들은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lor)”라 번역했다. 법정용어라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위로자의 의미보다는 변호사의 의미라 했다. 우리말 성경의 보혜사(保惠師)는 ‘보살피고 은혜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말, 아마 보혜사가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성령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것 같다.

예수님은 보내실 성령이 하실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먼저 죄와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정죄당하겠지만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 세상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죄짓고도 뻔뻔하고, 자신있게 불신앙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무시하고 배척한 죄는 반드시 심판받게 될 것이다.

의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도 의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성향에 따라 의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른 시대, 자기편이면 무조건 의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체해도 그런 의는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립되는 의, 구원이 되는 의다.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한 것, 그런데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시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대속의 죽음과 그것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의가 됨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이 제자들을 심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심으로써 이미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세상 임금이 제자들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세상 임금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주의 제자들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출교시키고 죽일 것이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책망하실 것,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거다.

이 일은 교회에 위임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예언이든 설교든,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이 일을 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인데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고 하셨다. 교회가 오직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한다는 말씀으로 보면 좋겠다. 이 말씀은 교회의 결정이 하늘의 결정과 직결된다는 말씀, 교회에서 파문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엄청난 말씀이다. 또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하셨다. 용서나 심판과 관련된 말씀, 교회에 위임된 권한이 이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좀 더 당당할 필요가 있다. 비록 세상이 교회를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여길지라도 우리는 교회에 부여된 권위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보다 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시대적으로 죄와 의에 대한 판단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무대 위에 떨어지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성을 갖는다는 것인데 웃기는 소리다. 그건 그들의 신학이 잘못된 것, 성경이 그 정도라면 그들에게 성경은 이미 성경이 아니다. 성경은 누가 뭐래도 종국적이고 완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어떤 목회자가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목회자들을 엉뚱한 소리하는 이상한 목사 취급하며, 동성애를 성경이 죄라고 한다고 해서 지금도 죄로 규정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크리스천 국회의원이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목사들 때문에 창피해 죽겠다고 말하는 것도 봤다. 시대에 뒤떨어진 창피한 목사라고 비난당해도 결코 성경을 시대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는 똑똑한 척하는 목사가 되면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척하는 목사들이 성경 안에 나오는 정결법이나 음식 규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폐기된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성경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한 것처럼 동성애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무식한 논리요 억지다. 동성애의 문제는 율법의 문제가 아니고, 직분 문제도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동성애가 여러 과학적 논의나 증언들이 그 선천성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호기심 또는 성적 타락이나 방종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교회나 교단이 결정하면 된다고 하지만 아니다. 창조 질서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다양성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포용해야 할 것인지를 교회가 결정하면 된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오버다. 하나님은 그런 결정권을 교회에 위임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를 죄라고 하고, 잘못된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을 위임하셨다. 그들은 성경이 반대하기 때문에 나도 반대하는 태도는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 자신의 게으름이나 욕구를 정당화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하는데 위임사항과 위임사항이 아닌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가 답답할 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때 보름즈 의회에서 “내가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다면 나는 단지 교황이나 교회회의만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반복적잘못과 모순 때문”이라 했다. 어느 목사의 주장이든 어떤 교단의 결정이든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한다. 루터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시대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한다는 자세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시대에 따라 성경을 재해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개혁 교단의 어떤 목회자는 개혁교회의 핵심 슬로건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며 성경도 루터의 말도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지만 성경은 결코 개혁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며 자기 독단적으로 교리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단되기 때문이다. 자기 착각을 성령의 감동이라 하는 것처럼 곤란한 게 없다. 기억하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

예수님은 성령이 세상을 상대로 행하실 일에서 말을 돌려 이제는 성도들에게 행하실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다. 아직 일러줄 말이 많다는 예수님, 지금은 감당치 못할 것이지만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거라고 하신다(13절). 이게 성령의 핵심적 기능이라는 거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 시대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을 봐야 하는데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성령이 교회에 함께 한 역사 즉 성령 행전이다. 그 성령 행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장이 ‘Acts 29’ 사도행전 29장부터는 우리가 쓴다는 자세여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성령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다.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 부분을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성령께서 도우심과 같이 앞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실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장래 일’을 종말 사건으로 보나 임박한 미래를 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거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14절).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성령을 통해 전하고 싶으신 것을 계속 말씀하신다. 이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15:28), 예루살렘 회의 후에 만든 사도칙령의 시작 부분인데 ‘성령과 우리’라고 표현했다. 성령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이런 사역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윤선 주석에 보면 그들은 사도 이후 시대의 신자들도 사도들과 같은 수준으로 계시받는다고 주장했다. 2세기 몬타누스(Montanus)가 그랬다. 그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새 운동을 일으켰는데 보혜사가 임한 시대는 몬타누스 자신으로부터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요 말씀이요 보혜사”라며 ‘새 예루살렘이 임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부리기아의 페푸자(Pepuza of Phrygia)’라 했다. 그의 제자 맥시밀라(Maximila)라는 여자도 “내가 말씀이요, 영이요, 능력”이라는 둥 자신을 최후의 선지자라며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했다. 망동, 성령의 일이 아니라 마귀 짓이었다. 문제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이런 일을 신천지 같은 데서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상당수의 성도들이 그 이단들에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무지한 게 너무 안타깝다.

우리는 13절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단의 꼬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

성령이 증거하는 죄, 의, 심판, 가르침, 장래일… 죄다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3-14절),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오직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업을 설명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떠난 독창적인 진리는 취급하시지 않는다. 오셔서 하실 증언의 핵심은 딱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다. 자신을 주목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주목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세 가지 양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3중적 형태로 분류하는데 우리도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계시 그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고,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며, 설교는 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렇다면 해석의 중심도 당연히 그리스도여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거룩함,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 그리스도의 진리 되심이 모든 계시의 중심임을 드러낸다. 오직 그리스도였다는 말이다.

죄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데서 기원하고, 의는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성령이 증거한 핵심인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바로 그 자체로 심판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담겨 있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가 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알게 된 이 사실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령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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