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이 국민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 남북을 나누는 휴전선이라는 경계선은 70년을 넘기고도 그대로이고, 동서를 나누는 경계선도 여전하다. 보이는 경계선만 있는 것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선은 나라를 두 동강 낼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수준이고, 남녀의 경계선은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유리천장’이라는 사회적인 용어가 아직도 남아있다. 강남과 비강남의 경계선도 여전하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에서는 이걸 냄새로 표현했다. 부유층 사람들이 반지하에 사는 사람이 풍기는 냄새를 역겨워하는 것, 결국 경계를 돌파하는 냄새 때문에 무시당한 자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부부 사이의 경계선은 어떤가? 어느 날 거실에서 부부가 TV를 보고 있는데 여자 탈렌트 차림새가 너무 멋져 보여서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나도 저렇게 입어 볼까?” 그러니 남편이 “사람이 뱃살을 생각해야지? 주제 파악부터 해!” 그런다. 평소에도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래서 점점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아내는 남편에 대한 마음이 굳게 닫혔다. 부부간에 경계선이 생긴 것이다.
본문에도 경계의 언어가 등장한다. ‘세상’이라는 단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대립되는 단어로 ‘세상’을 말씀하신 것인데 ‘세상에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사이에 경계선을 예수님이 그으셨다.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나? 예수님이신가? 세상인가? 당연히 예수님이 강하시지만 현실은 세상이 더 강한 것 같지 않나? 예수님은 강자는커녕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약자다.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주류였고 소수종파였다. 맨날 미움 당하고 박해받는다.
근래에 교회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대단한데 본문은 시작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18절), 교회나 성도들이 무시당하고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된 시대지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전혀 다르시다.
나를 미워하는 것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18절)고 하신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21절). 그래서 미워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신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절),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24절). 세상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이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죄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막연한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 특별한 관계로 강조되고 있다.
이런 말씀으로 인해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셨다. 그동안의 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분위기를 아셨기에 ‘미움’이라는 단어를 연속 쓰신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18절),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20절),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23절),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24절),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25절),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미움의 대상이시라는 말씀들이다. 25절의 ‘그러나’는 좀 예상밖의 접속사다. 유대인들의 행동이 터무니없을 만큼 기대밖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물어보자. 예수님이 미운 짓을 하셨나? 세상을 위해 좋은 일만 하신 것 아닌가? 하지만 주도권을 가진 기득권자들 입장에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운 짓만 하신 것,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결행하기까지 했을까? 십자가가 뭔가? 미움의 결정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온 인류를 구원하는 대속의 도구로 바꿔버리셨다. 미워하는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미움 당할 때 자신을 정당화하라고 하신다. 고난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라는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20절). 주인이신 예수님이 미움을 당하는데 종인 우리가 편안하게 호의호식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란 말씀이다. 좁은 길, 멍에를 메는 길, 십자가의 길, 이미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나를 미워한 줄 알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23절), 그 미움을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23절에서는 ‘나’와 ‘아버지’가 강조된다. 예수님은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부각시키며, 그들의 죄가 심각한 죄라고 폭로하신 셈이다. 우리가 하나라는 것, 우리가 받는 미움을 하나님이 당하는 미움으로 여기신다면 그만큼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기억하라.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다.
소속이 다른 것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소속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인데 한 구절에 ‘세상’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온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세상일 수밖에 없는 세상,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대적이 필연”이라 했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 말씀을 더 확실히 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5-6), 세상이 미워하는 이유가 소속도 다르고 말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 자신을 소개했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 보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다(3:7-9). 무익하던 것이 아니라 유익하던 것, 그걸 버린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된다면 자신의 출신이나 학벌, 지식, 명예, 일, 고난, 성공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버리는 게 하나도 아까울 게 없다는 것이다. 소속이 바뀌면서 자랑거리가 바뀐 거다. 생의 목표가 달라지고, 생의 기쁨도 달라진 거다. 고난도 당하지만 고난 중에 흐르는 은혜를 경험한 바울,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생의 목표요 기쁨이었다.
소속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쓰는 말에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만의 냄새가 나야 한다. 세상은 역겹다고 하겠지만 우리는 흔들림 없이 우리의 냄새를 풍기며 살아야 한다. 기억하라. 우리는 소속이 다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21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하는 미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미움이라 하신다. 이 세상의 무지는 하나님에 관해 듣지 못하고 그가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듣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며 순종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배척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미워한다. 박해한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20절), 이 말씀은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말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느냐 아니면 그의 말씀을 지키느냐에 달렸다는 말씀이다.
앞으로도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미워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세상과 우리 사이의 이 적대관계의 원인이 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 잘못해서 적대관계가 되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잘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으로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해서 비난과 미움을 살 수도 있고,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별로 잘못한 것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준에서 보면 온전하지 못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자기들은 개판치면서 우리가 개판치면 안 된다고 욕하며 미워하지 않나? 생각해보라. 지금 세상에 도덕이 있나? 엉망 아닌가? 그런데 자기들은 도덕이 다 무너졌으면서 우리에게는 높은 수준의 도덕을 요구한다. 자기들은 행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니까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준이 안된다고, 개독교라며 난리친다. 이렇게까지 악을 쓰는 것은 우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다시 말한다. 세상이 정말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다움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움을 꼴보기 싫어한다. 독선적이고 비이성적이라고 난리친다. 그래서 우리가 잘하면 잘할수록 더 미워하고 적대적으로 대할 것이다. 이게 세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같이 미워하면 안 된다. 컬투쇼에서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론 중에 있었던 일을 소개한 적 있다. 신부님은 그날도 어김없이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혹시 지금 ‘나는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 계신가요?”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나는 지금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 안 계세요?” 그러자 어떤 할아버지께서 조심스럽게 손을 드셨다. 신부님은 할아버지께 이유를 물었고, 할아버지는 “나도 옛날에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사람들은 “아, 저 정도 연세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서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나도 젊을 때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내 나이가 아흔 둘이 되니까 걔들이 다 죽었어. 다 죽어서 미워할 수가 없어” 그렇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세상, 그래서 세상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이다.
초대교회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가 당하는 미움, 영문 모를 반감과 비난, 죄다 이미 예수님 때부터 예고된 것이다. 우리는 잘하면 잘할수록 더 거세지는 미움, 이건 세상의 본능적 배척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압박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도 말아야 한다. 타협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고, 결국에는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려 할 것이다. 미움을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은 사랑, 요한복음 15장의 전반적인 맥락도 사랑이다. 그리고 16장에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라고 선포하셨다. 기억하라. 결국은 사랑이 이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