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가장 사랑한 작품 '백치'
세속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 제시
세상 보는 우리의 시각에 던지는 질문
'미'의 결정체 '백치'가 세상을 구할 것
'잘 해주면 호구 된다'는 말이 있다. 주기(give)만 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비꼬는 말이다. '기브 앤 테이크'가 적용되는 냉정한 인간사회에서 절대적으로 이타적이며 선량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절대적 선을 베푸는 사람은 그저 '백치'인 것일까.
음악극 「백치」가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를 기반으로 하는 이 음악극은 무려 3시간이라는 공연시간 동안 심오하고 철학적 대사와 함께 백치의 찬란함을 이끌어 낸다. 동시에 작품 속 냉담한 무신론자, 본능에 충실한 자 등을 배치해 다양한 인간군상이 어우러진 사회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소설 <백치> 주인공 '미쉬낀'은 절대 선을 지닌 인물이다. 천진한 아이를 좋아하며, 순진무구하여 편견이 없고, 오만하지 않으며,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를 조건 없는 사랑으로 품는, 오히려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상대를 쉽게 간파하며,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죽인 남성까지 용서한 그는 오히려 바보로서의 '백치'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가 활동했던 당시 19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 사회는 부와 명예의 논리가 적용되어 타락해 가고 있었다. 이를 초월하여 인류를 구원할 인물은 '백치'가 아니고선 어려울 거라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수는 '백치'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 미쉬낀을 통해 '예수'를 엿볼 수 있는 배경이다.
음악극 「백치」를 연출한 나진환 대표(극단 피악)는 연출의 글을 통해 "극한의 고통으로 인한 죽음 속에서 인간 예수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의 고통이 강렬할수록 그의 아름다움은 위대하다"며, "왜냐하면 그는 그저 신으로서 있지 않고 인간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움' 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십자가란 그런 것이다. 오직 '아름다운 인간의 죽음'만이 '아름다운 부활'을 낳는다"고 설명했다.
나 대표는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 <죄와 벌>, <악령>에 이어 <백치>까지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소설을 연극으로 완성시켰다. 그는 이번 <백치>가 "가장 어려운 작품이었다"고 토로했다.
나진환 대표는 "세상은 이러한 자를 '백치'라고 부르지만, 이런 자들의 세상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 잔치뿐인 위선의 이데올로기와 공허한 '공정'은 '죽음' 만을 남긴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을 향한 각자의 시각과 태도를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여운을 남긴다.
'백치' 미쉬낀은 「단테 신곡」의 단테 등 다수 작품에서 강렬한 연기를 펼쳐 온 한윤춘 배우가 연기했다. 한 배우는 "작품은 세속적이지 않은 인간의 고귀함, 이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세계와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며, "세상의 어둠 속에 빛을 찾으려는 인간, 그러나 그 빛을 보고 결국 눈이 멀어버린다.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이며 순수한 인간이 상처를 받고 결국 파괴되는 잔혹동화의 겨울공원 속으로 초대한다"고 전했다.
작품에서 차가운 겨울공원이 연상되는 무대는 임일진 교수(인천대)가 맡았다. 임 교수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은 나무들이 공허하고 차갑게 서 있는 공간이며, 그 나무들 밑에 있는 묘지의 비석들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엄중하고 슬프게 규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치며 형성된다. 지금처럼 이기적인 세상을 경험한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무조건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을 선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느리지만 조금씩, 자신의 선의를 믿고 가는 사람들, 즉 '백치'들에 의해서이다.
한편, 「백치」는 오는 12월 8일까지 공연된다.
극단 피악의 차기작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파리의 두 연인」으로, 스타니슬랍스키 엘렉트로극장과 공동제작했다. 내년 6월말과 7월초 서울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과 모스크바 스타니슬랍스키 엘렉트로극장에 각각 오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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