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여러 위기들을 이야기한다. 차별금지법으로 인한 신앙의 자유 위협, 한미동맹의 약화로 인한 안보 불안, 좌파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을 거론하며 이것들이 교회와 가정, 신앙, 더 나아가 나라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거리로 나가 시위하고,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이러한 외부적 위협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필자는 외적 위기보다 더 심각한 내적 위기가 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우리의 이중적이고 혼합된 신앙이다. 바로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위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와 호세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남 유다에서 활동한 이사야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호세아, 이 두 선지자의 시대는 각각의 나라가 외적으로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이사야가 사역했던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전히 예배와 제사가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애굽과 앗수르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며 그들의 방식을 따랐다. 호세아가 사역했던 북이스라엘은 더욱 심각했는데, 바알 숭배와 혼합주의로 영적 순수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사 31:1)
이사야 31장 1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 영적인 배신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 담겨있다.
남 유다 백성들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의 강력한 군사력에 의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애굽의 말과 병거, 마병의 강함을 보며 거기서 안전을 찾고자 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현실적인 판단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군사적 선택의 문제가 아닌 깊은 영적 배교의 문제였다. 선지자들이 외쳤던 경고의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울리고 있다. 진정한 위기는 외부에 있지 않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우리도 주일이면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힘과 경제적 능력, 사회적 영향력을 더 의지한다.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 대신 애굽의 병거와 마병을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 대신 세상의 방식과 힘을 더 신뢰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이중적 신앙은 우리가 위기나 어려움을 만났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인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정치적 힘에 의지하여 교회와 신앙을 지키려 한다. 자녀의 입시나 취업 문제 앞에서는 하나님보다 학원과 스펙을 더 의지하고,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는 투기나 불의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이중성은 쉽게 발견된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마케팅 방식과 인기 있는 프로그램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말씀의 능력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설교는 점점 더 대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간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이중적 신앙이 마치 현실적인 지혜인 것처럼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현실적으로도 준비해야 한다”는 말로 포장되거나, “하나님의 일도 세상의 방식으로 해야 효과적”이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포장된다.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조차도 이러한 이중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중적 신앙의 위험성은 결국 우리의 신앙을 형식적이고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기도는 그저 종교적인 의식이 되어버리고, 예배는 습관적인 행위로 전락해 버린다.
더구나 이런 이중적 신앙은 다음 세대에게 잘못된 신앙의 모델을 전수하게 된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 세대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나거나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자라나게 된다. 심각한 것은 우리가 점점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잠시 멈추어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기도를 이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도 실상은 인간적인 해결책을 더 신뢰하지 않는가?
교회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정치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거리 시위와 정치적 구호가 기도와 말씀보다 더 실효성 있는 방법이라 여기지 않는가?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법적,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지키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사야 선지자의 날카로운 지적을 깊이 묵상해 보자.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사 29:13,14)
이사야 시대의 남 유다처럼, 우리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우리도 애굽과 같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위기다. 외부의 위협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영적 타협과 불신앙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실천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세상의 이념과 가치관을 대변하는 정치적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복음의 순수한 메시지는 희석되고, 그 자리를 정치적 구호와 이념적 주장들이 대신하고 있다. 설교단에서는 십자가의 복음 대신 애국심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더 강조되기도 한다.
진정한 회복은 정치적 승리나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가 아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정치적 구호가 아닌 복음의 능력으로, 이념적 투쟁이 아닌 영적 거룩함으로 이 시대의 도전들을 맞이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발언권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복음의 능력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교회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이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이러한 회복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외부의 위협들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의 회복,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절실히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도 어찌 아래와 같은 책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사 30:1-3)
우리의 진정한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는 우리의 불신앙적 태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혼합된 신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듣고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사 30:15)
이러한 이중적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이중적인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때로는 세상의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방법만을 선택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유일한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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