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은 종교개혁기념 주간 특강으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를 개최했다. 유해무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가 ‘고재수의 신학과 고신 교회’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고려신학대학원 유튜브 캡쳐

고려신학대학원(원장 최승락 교수)이 29일 종교개혁기념 주간 특강으로 ‘고재수 교수 기념 신학강좌’를 개최했다.

고려신학대학원 준비위원회에 따르면 고재수(N.H Gootjes) 교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파송으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1980년부터 89년까지 교수 선교사로 봉사했다.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가 만나게 된 계기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 유학하던 이근삼 교수를 통해서다. 1962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 친구들이 한국교회를 위해 뭘 해 주면 좋겠냐고 묻자 교수요원을 한국에 보내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 이후에 그 교회는 한국 유학생들이 네덜란드에게 개혁신학을 공부하도록 했고, 18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고재수, 박도호 두 명의 네덜란드 교수요원이 한국으로 선교사처럼 파송되어 사역했다.

그러면서 준비위는 “고재수 교수의 소천 1주기를 맞아 그의 봉사를 기억하며 고신교회의 말씀사역과 교회 건설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념신학강좌를 개최했다. 강좌를 통해 고재수 교수가 충실했던 성경말씀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앙과 목회의 원리가 재조명되기를 바란다. 이 기념강좌를 발판삼아 고신교회가 말씀과 개혁주의 신학 위에 든든히 서서 개혁주의 신앙의 대한교회 건설과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에 매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미나에서 고재수 교수의 아내인 고서희 사모가 ‘고재수의 생애’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고 사모는 “제 남편인 고재수 교수는 1948년 7월 16일, Hendrik Gootjes와 Zwaantje Gootjes-Kooistra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 명의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네덜란드 북부 Leeuwarden 시에 살았다. 그곳에서 자유 개혁교회에 출석했다”며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 부엌의자에 서서 형제들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캄펀(Kampen) 자유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갔다. 그는 특히 야콥 반 브루헌(J. van Bruggen) 박사 밑에서 신약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는 바로 목회에 들어가지 않고, 석사 학위 과정을 밟기로 했다. 그는 교의학을 더 공부하기로 했다. 교의학이 중요한 과목이지만, 캄펀에는 교의학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저와 제 남편은 1975년 약혼하고, 1976년 결혼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목회자 후보가 되었다. 일곱 개의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일곱 교회를 모두 방문했다.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우리는 네덜란드 서부의 역사적인 도시인 레이던(Leiden)으로 결정했다”며 “남편은 늘 행복하고 감사하는 아버지였으며,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는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했지만, 특히 책 읽어주기를 좋아했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렇게 했다. 매일 저녁, 그는 큰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주변에 둘러앉게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몇 줄만 있는 단순한 아기 책부터 시작하여 톨킨의 <반지의 제왕> 같은 두꺼운 책까지 읽었다”고 했다.

고 사모는 “주님의 섭리로 우리가 살던 레이던은 네덜란드에서 유일하게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우리는 한국어 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말이 어렵지만 재미있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1980년 2월, 우리는 네덜란드를 떠나 부산으로 갔다. 우리는 1989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다. 그 10년은 어렵기도 했지만 복이 있는 시간이었다”며 “10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남편은 다시 목사로 사역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캐나다 해밀턴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은 목사 경력이 3년밖에 없지만, 교수 경력은 9년이 넘었기 때문에 교수로서의 부름에 응답했다.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캐나다에서 10년 동안 생활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캐나다에서의 삶은 참 좋았다. 한국보다 학생 수가 훨씬 적었지만, 가르쳐야 할 과목은 훨씬 많았다. 한국처럼 일부가 아닌 교리 전체, 윤리학, 철학 개론, 신조학, 신학 개론, 변증학 등을 가르쳤다”며 “2001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해였다. 결혼 25주년과 목회 25주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는 가정에서 축하 행사를 했고, 우리 교회와 신학교도 축하 행사를 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남편과 저는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레이던의 옛 교회를 포함한 여러 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미 2001년 남편은 질병의 초기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잊어버리곤 했고, 운전 중에 길을 잃기도 했으며, 컴퓨터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곤 했다. 2008년 더 이상 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처음에는 과로라고 생각했지만, 2010년 그는 초기 발병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 저에게 있어 남편의 알츠하이머는 큰 충격이었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끝으로 고 사모는 “남편은 2023년 8월 20일 주님의 곁으로 떠났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한국교회에서 남편을 기념하는 세미나를 준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남편의 한국 생활은 신학자로서 가장 활동적인 시기였다. 남편은 여기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고, 그들 중 일부와 관계를 지속해 왔다. 남편은 구속사적 신학에 관한 특별 세미나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은 한국어로 많은 책을 출판했으며, 그중 일부는 지금도 재판되고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고재수 교수를 기념하며 그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영광과 그분의 교회를 위한 것이기를 소원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유해무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가 ‘고재수의 신학과 고신 교회’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유 교수는 “고신 교회는 고려신학교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교회로 출발하였다. 유일한 장로교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 일제에 협력하던 이들이 1940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고, 1946년에 장로교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정받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고백자들은 해방 후 조선신학교 측과 이른바 교계 지도자들로부터 일제의 박해에 버금가는 배척과 박해를 받았다. 이들은 1946년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 정신과 실천은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믿음의 행동이었고, 이 믿음의 고백을 계속 실천하기 위하여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서울이 아닌 부산에 세웠다. 이 또한 시대와 공간에 얽매인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이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세상의 풍조를 거스르는 이 고백자들의 후예인지 확인할 책임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고재수는 1948년에 태어났다. 1974년에 네덜란드 캄펀 소재 개혁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76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9월 레이든 교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고려신학교 교수회의 요청으로 그는 1980년 2월에 한국으로 와서 교의학(서론, 신론)과 헬라어/라틴어를 가르쳤다. 고재수는 모국어인 화란어와 한국어와 영어로 여러 저서와 논문들과 다양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저서만을 살피자면, 『하나님의 영성』 (1984),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1987),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체험』(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 1991), 『교의학의 이론과 실제』(1천안: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2001), 『십계명 강해』(서울: 여수룬, 1998)등이 있다”고 했다.

유 교수는 “고재수는 설교에서 ‘하나님 우선’을 강조한다. 성경 역사에는 다시 재현되지 않는 역사적 발전이 있다. 발전이라 하여 불순종, 쇠퇴, 배반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구속사의 과거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다만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돌아보고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 성육신이 되풀이되지 못하듯,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도 마찬가지이다”며 “고재수는 성경 본문을 단지 일반적 규칙의 예화로 사용하거나 역사적 배경과 분리시키는 것, 한 요소만을 설교하고 적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성경의 사건은 역사적인 차이와 발전을 고려하면서 오직 성경 본문으로부터만 모범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고 했다.

이어 “고재수는 첫 신학의 원리로 제시한 하나님 우선을 고백에서도 찾는다. 그는 ‘신앙고백과 교회 교육’에서 교회의 교육을 위하여 신앙을 정리한 사도신경과 요리문답 특히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을 살피면서 두 고백서가 하나님 중심임을 주목한다. 비록 사도신경은 매우 함축된 형식으로 신앙의 내용을 요약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신앙을 더욱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특징과 차이가 있지만, 사도신경은 사실 삼위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중심 자리가 이미 첫 문답에 강조한다. 신학의 원리 가 아주 실천적인 교회교육, 그리고 성인이나 신학생이 아닌 어린이에게서도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유 교수는 “고재수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교육할 개인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목사와 교사도 제각기 기호가 다르다. 그 결과로 신앙교육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고, 또 같은 교파 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그룹들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신앙고백은 완전한 교리를 제시하므로 교사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 교사는 고백을 따라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며 “고재수는 한국교회에 파송 받은 선교사로서 당시 한국교회에서 주된 논쟁점이었던 성령세례와 신자의 체험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논문으로 발표한 다음에 이를 묶어 출판하였다. 이 주제를 다룰 때, 그는 해당 성경 본문 주석, 신앙고백 참조, 그리고 칼뱅을 위시한 개혁신학의 선배들을 인용하면서 체험 위주의 성령세례론을 비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재수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동일하게 성령 부어주심에 대해서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주어졌다. 우리는 개혁 전통을 따라 성령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기도하고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능력을 주는 성령의 제2 사역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기독교 생활은 성경을 읽는 것과 예배가 생활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생활이다. 이렇게 고재수는 제2의 축복과 능력을 말하는 오순절파의 주장을 거부하고, 신자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수한다”며 “고재수는 신자의 체험은 매우 좁다는 입장에서 체험을 표준으로 삼는 웨슬리를 반박한다. 가령, 창조,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몸의 부활과 영생을 우리는 체험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믿고 고백한다. 아브라함의 거짓말 등에서 보듯 신자의 체험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유 교수는 “고재수는 교리와 생활의 표준과 규칙인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이 주제를 개진한다. 자연적 신지식이 과연 일반계시의 결과인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이게 가능하다면, 이방인들의 신지식을 교의학에 포함시킬 수가 있을 것이며, 선교사들도 자연적 신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며 “고재수는 종교개혁 직후부터 자연적 신지식을 성경적이라고 여긴 확신이 있었으며, 증빙 본문으로 사도행전 14:15 이하, 17:26 이하, 로마서 1:18 이하, 2:14 등 네 곳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본문들을 여러 차례 주석하면서 성경 외에 하나님을 설명하는 자연적 지식의 존재 여부를 가늠한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 우선’의 고재수의 신학은 소박하다.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경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면밀하게 주석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성실하게 선포하는 겸손한 말씀의 사역자였다. 특히 한국에서 사역한 채 1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그는 개혁신학자로서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한국어를 배워 강의하고 저술하였다. 자매교회인 모국의 개혁교회의 역사와 신앙과 생활, 특히 가정과 교회와 기독교 학교가 행하는 교육을 자세하게 소개하기도 하였다”며 “고재수는 성경과 그 요약인 신앙고백의 의미를 잘 가르치면서 때로는 개혁신앙 밖의 주장들이나 그런 주장을 펼치는 신학자들을 비판하였고, 때로는 우리 신앙고백이나 개혁신학의 선배들의 특정 주장도 교정하였다. 그에게 칼뱅, 바빙크, 벌코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비판과 교정의 저력은 고재수의 차분한 성경 주석,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이런 교정을 통하여 그는 개혁신학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했다.

유 교수는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복음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신학임을 밝혔다. 개혁신학자로서 신학 강의와 설교에서 ‘하나님 우선’을 실천한 고재수의 사역이 특히 많은 신학생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여전히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에는 그가 가르쳤던 대로 구속사 설교와 신앙고백을 중시함으로써 신학과 설교가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성경관과 설교 방식에서 진일보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착하거나 널리 파급되지 못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과 같은 교재로 교회가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교리의 어떤 부분을 무시하거나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을 벗어나라는 그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고신 교회는 여전히 성령세례와 같은 개혁신학과는 동화될 수 없는 여러 주제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들은 오늘 여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고재수 교수의 ‘하나님 우선’ 신학에 힘 입어 깊이 반성하고 개선하며 개혁해야 할 과제이다”고 했다.

한편, 세미나는 이어 최승락 교수가 ‘고재수의 삶과 신학을 고신교회가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 고서희 사모가 ‘고재수의 한국 생활과 사역’. 박도호 교수가 ‘동료로서 본 고재수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사역’, 권수경 목사(일원동교회 담임)가 ‘고재수의 삶과 고신교회’라는 주제로 각각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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