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예수님은 사역초기에 궁핍하고 무식한 유다 대중들을 향해 지복(至福)을 선포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이제 십자가 처형을 앞둔 고난주간에 당신의 사역을 마감하면서 그와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권세 있고 부유하며 유식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저주를 선포합니다.
주님이 공생애 삼년 동안에 그들로부터 받았던 조롱과 핍박을 앙갚음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껏 그들의 훼방과 궤휼에도 벌주지 않고 당신만의 인자와 긍휼로 종내 참으셨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진정으로 겸비해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천국에 입성할 방도는 없어집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외식했기 때문입니다. 외식의 헬라어 ‘휘포크리테스’는 아시는 대로 맡겨진 인물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를 뜻합니다. 당시는 하회 탈춤처럼 마스크를 쓰고 연극하는 경우가 많은데 배우들이 마스크 수십 개를 갖고서 극에 따라, 혹은 극중에도 마스크를 갈아 쓰곤 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자신과 다른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외식하지 않으려면 요즘 유행어로 말해 사진에 ‘포샵’ 혹은 ‘CG처리’하지 않아야 하고, 평소에도 화장하지 않고 ‘쌩얼’ 혹은 ‘민낯’으로만 살아가야 합니다. 외화 TV 시리즈인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어선 안 되며 오직 한 가지 얼굴만 가져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 누가 봐도 한 결 같이 동일한 모습이어야 합니다.
신자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그래야 합니다. 그럼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죽기까지 순종하려는 자세로 서는 것입니까? 또 그러기 위해서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키며 피 흘리기까지 죄와 흑암의 세력과 싸우는 것입니까? 물론 신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한다고 해서 신자라면 누구나 또 항상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노력하고 훈련하여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목표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의 얼굴이 된다는 것은 노력해서 장차 도달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서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얼굴이 둘 이상이 아니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 어떤 마스크도 쓰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라도 마스크를 쓰면 안 됩니다. 말하자면 믿음, 순종, 경건, 감사, 경배 같은 한 가지 기독교적 모습을 유지함에도 얼마든지 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얼굴이란 주님 앞에선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들어 내보이는 것입니다. 죄에 찌들었다면 모든 것을 토설하면서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침체되었거나 애통해 있다면 성령의 위로와 능력을 구하면 됩니다. 힘들고 위급한 경우에 처했다면 주님의 구원을 절실하게 구하면 됩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가 아뢰지 않아도 우리보다 더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 체질이 진토이며 여전히 죄의 본성이 펄펄 살아있고 그래서 쉴 새 없이 죄를 짓고 있음을 보고 계십니다. 심령에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떤 더러운 죄악, 허물, 상처도 완전히 꿰뚫어 보십니다. 그분 앞에 단 하나도 숨길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주님 앞에서 죄악을 비롯해 인간적 욕심, 고집, 편견, 독단 등 모두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겸비해져 완전히 발가벗고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의 영적인 성숙, 아니 건강을 위해서 그래야 합니다. 또 그러는 것이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복을 받고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선 참된 행복과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고 주님만이 진짜로 기쁨이 되기에 기꺼이 자진해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믿음이 어지간해도 자기 실체를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는 일이 참으로 부끄럽고 때로는 두렵게 여겨집니다. 이미 하나님이 속속들이 알고 계실 텐데도 그러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 앞에서마저 치부와 허물을 가리고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합니다. 가장 더럽고 추한 죄의 본성인 교만이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에게나 자신의 영적 실상은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고 두려워 어느 누구에게도 꺼내놓기 힘듭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의 죄 값, 허물, 상처, 수치, 고통 등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습니까? 당신에게만은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 앞에서조차 우리 실상을 숨기려는 차원을 넘어서 도리어 가장, 과장, 변장하여 위선을 떨려는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제가 봉사와 헌금을 이만큼이나 했으니 하나님도 내 요구 이정도 쯤은 들어주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거나 떼쓰기 일쑤입니다. 봉사와 헌금이 자발적이고 기꺼운 것이라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 받으시고 그에 따른 은혜도 베풉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그것을 빌미로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는 것은 그분 앞에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하는 것 즉, 자기 본 얼굴을 감추고 종교적인 마스크를 쓰는 외식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평생을 감사와 영광을 그분께 돌리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일은 사실상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믿은 후에 요구하는 것도 오직 하나, 맨 얼굴로 당신 앞에 서라는 것뿐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것마저도 제대로 못하면서 우리의 종교적 실력만 높여 그분의 복을 더 많이 받아내려 시도하고 있으니 이 또한 너무나 어리석지 않습니까?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에 상응하는 벌로서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문을 닫았고, 안 들어갔고, 또 다른 이도 못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초한 벌, 정확히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 가운데 어느 누가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유대교를 신봉하던 믿음만큼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조차 도덕적, 종교적 가면을 쓰고 자신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당신을 속였다고 괘씸해서 저주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들 실체를 당신께 안 보여주었기에 주님도 당신의 실체를 그들에게 안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전혀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또 그들이 자기들 실체를 그분께 보여주지 않으려 했으니 천국 문을 자기들이 닫은 것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그들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제대로 못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사렛의 한 무명 랍비의 모습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만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과 공의 앞에 도무지 바로 설 수 없는 철저하게 타락했던 자신의 영적 실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에 여러 개의 마스크를 쓰고서 나아갈 생각을 추후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또 그러는 것만이 자신의 온전한 기쁨과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가난한 심령이 되면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을 스스로 닫은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장 먼저, 아니 꼭 이루셔야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기에 그 속죄가 자기에게 이뤄진 것을 믿는 자라면 언제라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신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신자 된 가장 근본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만은 절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오직 하나의 얼굴로 서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침마다 말씀과 기도로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믿음을 점검해야 할 측면도 바로 하나님 앞에서조차 혹시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여부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죄와 허물은 가리고 복부터 받으려 하는지, 죄와 허물이 진짜로 더럽고 추하다고 여겨지기에 그것부터 씻어내려고 주님의 긍휼만 구하며 그 외의 자신의 모든 것은 주님의 주권 아래 완전히 맡기는지,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1/5/13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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