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시9:1,2)

예수를 믿은 후에 경건을 쌓아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아니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거의 모든 신자가 절감할 것입니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기 일쑤이고, 내 속에는 탐욕의 찌꺼기가 끈질기게 남아 있으며, 문제나 고난이 생기면 불안 초조가 너무나 쉽게 나를 장악해버립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혹은 어떻게 해야만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감사가 넘치는, 최소한 평강이라도 유지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젠 그런 기대나 소망조차 접고 습관적 의무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스스로 의심스럽기조차 합니다. 말하자면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단계는 내 사전에는 없을 것 같아 불안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도 하나님 앞에 신자로서의 체면이 도무지 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영적인 ‘전투(戰鬪)’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승리로 결말지어지지 않으면 믿음의 싸움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소망스런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야만 비로소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세상 유혹과 시험에는 무조건 백전백승해야 합니다. 속에선 탐욕 대신 성령의 생수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샘솟아야 합니다. 문제와 고난이 발생해도 아무 걱정 없이 담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 자체에서도 승리로 결론나기 전까지는 자신은 계속 영적전투에서 실패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까 우리 신앙에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되지 않습니까? 분명히 승리하여 평강을 갖는 것은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대로 쓸 만한 믿음으로 여전히 영적 전투 중에 있다면, 아무리 그 전투가 격렬하고 아직도 승리는 요원해 보이고 나에게 쓰라린 상처와 잦은 쓰러짐만 생기는 것 같아도, 사실은 잘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전쟁을 치르는 자가 전황이 조금 불리하다고 해서 전쟁에 졌다고 예단한다면 아예 군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미리 겁을 먹는 자라면 차라리 싸우지 말고 미리 항복하는 것이 피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전투의 연속입니다. 승리의 연속이 아닙니다. 승패가 수시로 교차합니다. 무엇보다 승리의 연속을 얻으려는 데에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고 지치지 않고 싸우게 만드는 데에 정작, 그리고 더더욱 필요합니다.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하지 않고서 승리가 드물다고 절대로 낙망해선 안 됩니다. 승리를 쟁취하고서 감사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낙망을 뚫고서 승리를 누려야 진정한 감사가 나오며 그 믿음은 훨씬 업그레이드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은 신앙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승리 없이도 무조건 감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기쁜 일이 생겨야 감사 찬송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부터 하는 것이 잘못된 신앙입니까? 심지어 기쁜 일로 찬송할 때도 여태 해결되지 않은 다른 문제들이 생각나서 온전한 감사 찬양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신자가 영적 전투에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쁜 일이 생겨야 감사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걱정부터 생기는 것 자체를 잘못이거나 미숙한 신앙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 본성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시험, 유혹, 문제, 환난 같은 외부적 자극은 물론 자신 속에서 나오는 정욕과 죄 같은 내부적 자극에 대해 자연스레 나타나는 일차적인 반응입니다. 자신의 지성, 교양, 의지, 도덕성, 믿음으로 사전에 통제해서 그런 반응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런 반응이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입니다. 그 반응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따라서 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렇다고 문제나 환난을 일부러 경시(輕視)하거나, 어려운 일에도 억지로 기뻐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을 정확하게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대처하라고 해서 현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비교 판단하는 지혜를 제거해버리면 미혹이나 맹신에 빠질 뿐입니다.

정작 믿음이 힘을 발휘해야 할 영역은 그 자연적 일차 반응에만 묶여 있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없는 새로운 가치를 의도적으로 창출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믿음이 자신마저 기만하는 아주 편리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음에 오히려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현실의 실체는 정확히 파악하되 거기에서 초월하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또 초월이라고 해서 초자연적으로 신령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영적 전투 중에 있을 뿐인데도 자꾸 지고 있거나 이미 졌다는 착각부터 버리라는 것입니다.

외부의 시험, 유혹, 문제, 고난과 내부의 탐욕, 죄 등으로 불안 초조해지면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영적 전투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자에게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이 불어주시는 출전을 준비하라는 나팔입니다.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신자의 영에 그대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를 영원토록 떠나지 않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 어떤 장소, 무슨 일에서나 나 대신에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께만 의탁하는 것이 완전히 신앙 습관으로 몸에 배어야 합니다. 내외부의 자극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자연스레 반응이 나오더라도 그보다 더 자연적으로 주님 쪽으로만 향해져야 합니다.

자연적 반응이란 반드시 내외부적 자극인 선행된 것입니다. 어쨌든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부정적 원인이 있으면 자연히 부정적인 반응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부정적 원인은 절대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없어질 수가 없으며, 나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과 피조세계가 함께 벌을 받았기에 이 땅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죄악의 도성으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에게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것 자체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그 부정적 반응을 없애려고만 하는데 모든 힘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만 수없이 노력했었지만 실패했지 않습니까? 물론 믿음으로 감사와 기쁨과 찬양을 회복해야 하고 또 그렇게 된 적도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또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문제와 고난이 닥치면 자연히 부정적 감정에 다시 휩싸이고 그래서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일을 평생 반복해야 할 것 아닙니까?

시편 9편은 다윗이 승리에 대해 감사하는 찬송입니다. 그 감사를 한마디로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6절)고 표현합니다. 싸울 때마다 이겨서 승리는 아예 당연한 일상사처럼 되었기에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합니다. 원수가 끊어지고 영영히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윗처럼 기억도 못할 정도로 계속 연전연승한다면 얼마든지 찬양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절로 주위에 전도와 봉사도 열심히 할 것 같습니까? 단연코 그 대답은 둘 다 “No."입니다. 현실에서 풍족하면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즐기기에 더더욱 주님과는 멀어질 뿐입니다. 거기다 다윗이 찬송하게 된 배경이 정말로 백전백승 때문일까요? 혹시라도 그 연속되는 승리의 와중에 어려움이라고는 전혀 없었을까요?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 기록으로는 그만큼 고초가 많았던 인생을 산 자도 드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어떻게 찬양했습니까? 전심(全心, with my whole heart)으로 주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부분적인 마음(partial heart)으로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찬양이 가능합니까? 그 답은 바로 다음 절에 있습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주가 주신 기쁜 일”과 “주가 주신 지극히 높으신 승리”를 찬송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감사와 찬양의 대상은 여호와 그분이었습니다.

또 어떻게 그런 찬양이 가능합니까? 결코 백전백승을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1절에서 주의 모든 기사(all Your marvelous works)를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 승리를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그분만의 고유한 사랑과 권능이 풍성히 넘쳤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그 은혜를 다른 이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는데 바로 이 시편으로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유난히 좋았던 일만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하는 모든 일이 다 경이롭더라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실제로 모든 일이 경이로워져야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어야 전심으로 그분 당신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백전백승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백전백패 한 가운데도 주님의 경이로움을 발견한 자만이 전심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현실적으로는 신자가 궁핍하고 실패한 것 같아도 주님은 실패하지 않았고,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뿐 아니라 주님 당신의 영광은 단 한 치의 손상도 안 생기더라는 진리를 체험적으로 절감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찬양입니다.

신자의 경건이 제대로 쌓이지 않는 이유가 우리가 기도와 말씀에 등한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발생한 모든 일들이 사실은 그분의 경이로움의 연속이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문제와 고난 가운데서도 그분의 너무나 크고도 풍성한 은혜와 권능 가운데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해 기도하고 말씀 보는 목적도 바로 그런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는 것임에도, 영적 전투를 이기려는 욕심으로 승리만 달라고 부르짖고, 또 쉽게 승리 얻는 길이 없을까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실패라고 여기는 문제와 고난 가운데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려야만 진짜로 경이로울 것 아닙니까? 기쁜 일에선 경이로움은 없고 단지 저절로 기뻐지고 겨우 주님의 능력만 발견할 뿐입니다. 실제로 저를 비롯한 우리 중 대다수는 신앙생활 수십 년이 되어도 계속 이 언저리에서만 머물지 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주님의 경이로움이라고 해서 또 다시 크고 풍성한 일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땅이 되어져 가는 꼬락서니가 심지어 우리가 쳐다봐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데도 여전히 해와 비를 거두지 않으시는 것이 진짜 경이롭지 않습니까? 아니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하나님의 경이로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분의 능력, 그분이 주시는 기쁜 일에만 목을 매다는데도 때로는 기도 응답을 우리 기대나 예상보다 더 크게 해주시는 것이 더 경이롭지 않습니까?

부정적 원인이 끝없이 생기기에 부정적 반응도 자연히 항상 생긴다면, 또 그 원인을 절대 제거할 수 없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이겠습니까? 누차 강조하지만 억지로 긍정적 원인에 긍정적 과정에 긍정적 결과라고 내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으로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굳센 믿음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리 부정적 긍정적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경이로움은 절대 손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의 행사가 전지전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언젠가 합력해서 나에게도 유익하며 전체적으로 선으로 이루실 것도 확실합니다. 그분의 영광도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은 너무 힘들고 자꾸만 뒤로 밀리고 있는 것 같아 도무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며, 혹시 이미 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고 불안할 때에도 주님의 경이로움에는 절대로 손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래서 범사에서 주님 그분을 기뻐하며 진짜로 전심으로 감사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11/7/6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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