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했습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실로 ‘십자가’는 위대한 구원의 성취이자 새로운 세계의 출발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까지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제한된 자유입니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을 보세요. 그들은 동물원 안에서 나름대로 자유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동물원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이 울타리를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완전한 자유를 허락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유익한 은혜는 바로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절대로 율법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자유의 선물입니다.

또 하나 십자가은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은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었기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프로울 목사는 “은혜와 자비는 베풀어지는 것이지 결코 권리로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은혜와 자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받을 흉악한 죄를 지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설령 기회를 다시 가진다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완전히 패망한 사람이 빚쟁이더러 3일만 기회를 달라한들 그가 빚을 갚을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인간은 약간의 흠집밖에 나지 않은 거의 완벽한 존재로 착가해서는 안됩니다. 1619년 도르트회의를 통해 우리 선조들은 인간이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하여 구원을 인식하고 구원의 부르심에 대해 반응할 수 있을만한 그 어떤 기능도 가지지 못한 존재임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는 칼빈의 의견을 기초로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 상태를 ‘날개는 가졌으나 날지 못하는 날개’라고 비유한 바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겐 조금의 선함과 정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타락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악행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지속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스프로울 목사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설파합니다. “한 번 불완전한 상태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완전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능력으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의 얼룩을 지우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죄를 없애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청을 받는 즉시 하나님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따지더라도 하나님에게 등지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가서 따져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따질 마음이 생기고, 드디어 주님에게로 가서 작심하고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에게 ‘십자가의 은혜’의 빛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을 붙잡아 주신 것입니다. 당신 머릿속에,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고 떠오른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자 성령님의 부르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4. 결어

오늘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은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말미암아 나도 모르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며, 진리를 깨달아 사리분별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알며 살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십자가 은혜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미움과 증오와 원망과 불평과 저주와 정죄와 다툼과 혈기들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나도 모르게 내 안의 독소들이 점점 소멸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안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겪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멸의 은혜를 누리고, 다른 하나는 열매의 은혜를 누립니다. 이 속에서 일어나는 은혜가 당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바깥 인생은 어떠해야 합니까? 칼빈은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의 새 삶은 자신의 삶속에서 중생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우리가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제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에 조금도 이 성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이 거룩한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늘 실족하고 주춤거리고 뒤돌아서며 방황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며 힘을 북돋우시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우리를 ‘십자가너머’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에게 비추어진 이 ‘십자가 은혜’의 빛이 저 영화의 세계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영원한 영광이 스려있는 저 ‘십자가너머’의 세상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오늘도 달음박질하는 성도님들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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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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