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장손>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부 공장의 창업자인 승필은 대가족을 거느린 깐깐한 노인입니다. 일평생 고생 끝에 대구에서 손꼽히는 두부 공장을 이뤄낸 그는 가업이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자식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공장을 맡고 있는 외아들 태근은 아버지가 고집해 온 수작업 방식을 접고 기계화 방식으로 바꾸려 합니다. 손자이자 집안의 장손인 성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서울에서 배우로 성공하고 싶어 하죠. 공장을 맡지 않겠다는 성진, 아버지와 아들이 죄다 불만스러운 태근, 성진이만 끔찍이 편애하는 승필의 아내 말녀, 이들을 주축으로 승필의 두 딸과 사위들, 성진의 누이와 그녀의 남편까지 이들 대가족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티격태격하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할머니 말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 간에는 묵혀두었던 갈등이 폭발하게 되고, 예기치 못했던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해묵은 소재, 참신한 시선
가족 간의 갈등이란 어찌 보면 해묵은 소재임에도 이 영화는 그것을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가부장제의 모순이야 익숙한 이야깃거리지만, 유산을 두고 벌이는 신경전이나 남아선호사상이 빚어내는 비극을 딸의 희생을 발판 삼아 미스터리 방식으로 그려냄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차별성이 두드러집니다. 승필의 큰딸은 아버지의 왜곡된 아들 사랑 때문에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고 삶이 파괴됩니다. 참다못한 그녀가 저지른 극단적인 일은 또 다른 피해자를 낳고 말죠.
영화 속 남성들은 모두 결함을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 승필이 고령으로 배설에 어려움을 겪는 장면은 서글프긴 하지만 그의 무능함을 상징하죠. 게다가 그는 ‘레드 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을 일컫는 말)에 사로잡힌 ‘꼰대’로 보입니다. 대학생 시절 데모하다가 입은 상처로 다리를 저는 태근은 민주투사와는 거리가 먼 그저 그런 아저씨일 뿐이고, 성진은 보증금을 털어 영화를 만들 정도로 열정이 있지만 무명배우일 뿐입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태근이 언쟁 끝에 뜨거운 국그릇을 뒤엎자 곁에 있던 사위가 남성의 주요부위를 데는 장면은, 남성성에 대한 은근한 조소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장손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가족주의를 조롱하거나 냉소를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무심코 뱉은 말, 사소한 것들로 다툼이 일어나는 장면들을 오히려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하니까요. 갈등의 시발점이 된 승필이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큰딸의 행동이 옛 상흔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보게끔 합니다. 한편으로는 피로 맺어진 가족이라고 해서 정말로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관계인지 진지하게 돌아보게도 하지요.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의심받다
최근 들어 새로운 가족관을 반영한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을 이루는 것은 혈연이라는 끈만이 아니다’라는, 소위 ‘유사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죠. <고속도로 가족>(2022), <담보>(2020)와 같은 한국영화는 물론, <브로커>(2022), <어느 가족>(2018) 등의 일본 영화뿐 아니라 멕시코 영화 <로마>(2018) 등은 모두 유사 가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족의 의미를 재조명한 바 있습니다.
이렇듯, 유사 가족이라는 개념은 혈연관계에 못지않은 끈끈함이 대안 가족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설령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서로의 상처에 공감하거나 함께 이뤄야 할 공동의 목표가 있다면 그 끈끈함은 배가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가족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유사 가족의 대표격이라 하겠습니다. 유대인 바울과 혼혈인 디모데 사이에는 혈통적 거리감이 없지 않았을 것임에도,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여러 차례 “아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니까요(고린도전서 4:17, 디모데전서 1:2, 디모데후서 1:2).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바울이 급히 찾은 사람도 디모데였습니다(디모데후서 4:9). 무엇이 혈연적으로 무관한 이 두 사람을 유사 부자 관계로 묶을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기록한 여섯 권의 서신(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에서 디모데는 바울과 공동 저자로 거명될 정도로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말합니다(빌립보서 2:20-22). 복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이들을 유사 가족의 관계로 만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유사 가족이 진정한 가족이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옵니다. 누군가 예수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알려줍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더라도 친가족을 맞이하는 것이 보통이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라고! 형제의 범위가 육신의 형제를 넘어서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마가복음 3:31-35).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의 의미를 묻는 이 시대에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혈연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순종의 삶을 사는 자들로 이루어진 영적 공동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함으로 맺어진 유사 가족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부합하는 참된 가족일 것입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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