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사람들은 철학하면 매우 고매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철학하면 제일먼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떠올리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학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철학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고매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한편, 이러한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정 반대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삼고,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구원의 능력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철학을 무시한다. 신학은 확실히 모든 학문 중의 최고인 것만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철학을 무시하면 무시하는 만큼 무지한 자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과 신학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알아보자.

첫째,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는 요소는 철학의 이성(Reason)과 신학의 계시(Revelation)다. 이 두 가지가 차이의 핵심이다. 우선 이성은 인간의 영역이고, 계시는 신(하나님)의 영역이다. 계시를 먼저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으로 계시를 이해할 뿐이지 인간 자체가 계시적 사건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영적 죄과를 가진 인간을 다시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구원할 자인 그리스도를 보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과정을 학문으로 만든 것이 신학이다. 이성은 계시와는 반대로, 인간의 영역이라 말했다.

인간은 모든 사물과 현상을 이성으로 파악하고 이해한다. 이성이란, 모든 사물과 현상, 그리고 학문적 상황에 대해 갈등과 모순이 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도구를 말한다. 날카롭게 비평하고, 평가하는 실체를 말한다. 인간이 생각하는데 있어서 이성을 잘 써야 부끄러움을 안 당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12세기 카톨릭 신학자 안셈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아퀴나스는 스콜라주의를 세웠다. 이는 철학과 신학의 종합이며, 철학의 이성과 신학의 계시와 상호 협력관계를 말하는 사상이다. 그들은 “이성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철학의 핵심으로서의 이성이 인간생활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학문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실체임을 말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를 이성보다 위에 두었다.

이와는 반대로 마틴 루터는 이성을 아주 안 좋게 보았다. 이성으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이다. 이 역시 맞는 말이다. 이성으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계시로 인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론인데 이성으로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성으로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물 위를 걸으신 기적같은 것이다. 그런 경우 계시를 동원하여 구원의 과정을 말할 수 있다. 즉, 아퀴나스처럼 철학의 이성과 신학의 계시의 상호협력관계가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성과 계시는 이와 같이 협력하기도 하고 배타적이기도 한 차이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 일종의 구조론으로, 철학은 사유(생각)하는 것으로 학문을 하지만, 신학은 믿음으로 한다. 사유는 철학의 기본 방법론이다. 사유하는 것으로 철학을 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는 “사유하지 않는 삶이란 살 가치가 없다(A life without thinking is not worth living)”고 말하여 사유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삶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사유는 무엇으로 하나? 사유란 이성으로 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존재 및 삶의 방법론에서 지혜로운 삶의 길로 이끈다.

신학은 믿음으로 한다. 생각이 신앙의 주체가 아니다. 믿음, 또는 신앙으로 신학을 한다. 연구, 또는 증명으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닌 믿음이라는 신앙으로 한다. 신앙은 감정이나 이론적 작업을 환경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다.

셋째, 타입(Type)에서의 차이다. 철학은 주로 질문하는 형태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고, 또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자연과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와 같은 질문들이다. 이렇게 질문하거나 물음에 관한 것은 철학의 영역이다. 철학은 인간의 학문이다. 그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한없이 약하고, 모르는 것으로 가득찬 존재들이다. 아무리 이성을 동원해도 유한성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질문을 하게 된다.

반면, 신학은 대답하는 형태다. 인간들의 질문에 대답을 주는 것이 신학이다. 왜?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으로서 신만이 중심이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 40:26에서 “너희는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지 보라”라는 인간질문의 형태를 동원한 후, “이것을 창조하신 이는 야훼니라”라고 대답을 한다. 신약에서 도마가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어디로 갈런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신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이렇게 답을 주셨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아무리 신학적인 내용일지라도 질문의 형태면 그것은 철학에 속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질문들은 인간이 하지 하나님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질문에 대답을 하실 뿐이다. 그래서 신학은 모든 인생사에서 나오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학문이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는 몇몇 카테고리가 있으나 지면상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만 알아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위애서 언급했지만, 철학을 세속학문으로 규정하여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렇게 질문을 하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답을 주심으로 신의 정체성, 성품, 신격,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목적, 인간에 대한 구원의 계획 같은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오늘날의 대다수 목회자들이 오로지 신앙만을 부르짖고 주장하여 바른 신앙관 형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성이 뒷받침하지 않는 신앙은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이단이 되고 만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지(지식·이성), 정(영적 감정), 의(도덕적 실행)도 철학과 신학의 상호협력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결국, 철학과 신학은 그들 자체 정체성에서는 차이가 분명하게 있지만, 때로 상호 도움적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철학은 질문하고 신학은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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