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행3:6-8)
매일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를 베드로가 말씀 한 마디로 일으켜 세우는 이적을 베풀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능을 온전히 확신하는 바탕에서 나온 선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명령했지, “하나님! 이 자를 고쳐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지 않았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선포가 가능합니까? 또 만약 우리에게도 그런 확신이 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불구자에게 명령해도 되는지요? 아니면 초대 교회에만 일어날 수 있었던 특별 케이스입니까? 오늘날에는 아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기대조차 말아야 합니까?
이런 숱한 질문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단순명쾌한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또 그 답은 백이면 백, 확고한 믿음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병이 든 까닭을 단순히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이 난 것과 건강하지 않은 것과는 사실상 동의어(同意語)인데도 말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신자들이 흔하게 범하는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나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믿음의 비결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단순화, 일반화, 공식화 시키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특별히 기도의 응답을 잘 받아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매뉴얼을 만들고자 합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작성된 매뉴얼 역시 “강한 믿음을 가지라”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무슨 문제든 해결될 것 같아, 그 길을 찾았는데, 여전히 강한 믿음을 가지라가 답입니다. 병이 낫는데 건강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아서 온갖 궁리를 한 끝에 더 건강해져야겠다고 결심한 꼴입니다. 이젠 병이 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여전히 믿음이 처음 시작한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내용과 모습을 하나의 도식으로 일반화 시키면 안 됩니다. 모든 사건을 각각 따로 떼어서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일대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통치하십니다. 당신의 은혜와 권능의 풍성함과 좋음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지만, 그것이 실현되고 인식되어지는 통로와 여건은 각기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듯이 당신께서 신자를 대하시는 방법도 그러합니다..
놀랍게도 본문의 앉은뱅이에게는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환자가 믿음을 가졌다는 구체적 기록이 성경에 없어도 믿음 없이는 병이 결코 낫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5절) 그는 단지 동냥 얻을 생각뿐이었다고 성경이 분명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나면서 앉은뱅이”라고 명시한지라 고침을 받을 기대조차 전혀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환자에게 믿음이 없으면 전혀 낫지 않는다고 해버리면 하나님의 능력마저 제한하는 셈이 됩니다. 믿음이 그분의 능력보다 우선이 됩니다. 믿음을 만능이라고 가르치는 한국교회는 오히려 하나님 그분을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대체하는, 다른 말로 믿음 자체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본문처럼 신자가 믿음 없는 신자나 연약한 신자를 위해 기도하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약5:14)
정작 우리가 살펴야 할 측면은 환자보다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긴 했지만 어떻게 앉은뱅이를 보자마자 일어나라고 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부분에서도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베드로의 믿음이 우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라거나, 초대교회에선 모든 신자에게 기적은 일상사였다고 간주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에 베드로가 만난 불구자나 환자가 이 앉은뱅이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기에 만나는 자마다 다 고쳐주었어야만 합니다. 그랬다는 기록이, 아니 힌트조차 성경에는 없습니다.
분명 초대교회 사도들은 오늘날과 비교 안 되게 기적을 많이, 크게 일으켰지만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사도들이 병을 낫게 하는 능력 자체를 소유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능력이란 자동차 운전하는 식으로 자기 몸에 완전히 배어있어서 항상 작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과 문제와 환난을 해결하는 그런 능력은 오직 성삼위 하나님만이 소유합니다.
베드로로선 어떤 면에선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성전 미문을 그 전에도 많이 다녔고 그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소리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무심코 지나치다가 이상하게 그날만은 그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내면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었거나, 성령의 충만함이 가슴에 가득차면서 그런 명령이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자신이 도무지 거역할 수 없을 만큼 그 음성 내지 충만함이 컸습니다. 또 성령 충만 내지 음성을 들은 시점과 그 명령이 자기 입에서 발하게 된 것과의 시차는 거의 없을 정도로 순간적이었던 것도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를 사용해서 주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당신께서 직접 행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신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전적으로 그 인도에 자신을 내어맡길 때에 활발히 일어나는 법입니다. 초대교회에선 기독교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면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 뜻대로 따르려는 열정과 헌신이 대단해서 자연히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고 역사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도 응답이 신자가 뜨겁게(?) 믿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럼 이젠 기도가 하나님을 대체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성령이 당신의 뜻대로 역사하여야만 응답되고 그러려면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자세부터 바로 서야 합니다. 그분과 개인적 관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거룩하고 친밀하게 맺어져 있어야 합니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두고 믿음과 기도의 수준을 열정적이고도 확고하게 높이려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모읍니다. 쉽게 말해 병이 낫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열심히 기도하다가 그 응답이 생각보다 더디거나 안 되면 내 믿음이, 내 기도에 잘못이 있는지부터 따집니다. 그리고는 믿음에 활력을 조금 더 부여하고 기도하는 모습이나 내용을 수정하여 반복해서 응답을 간구해 봅니다. 그래도 능력이 안 나타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앙입니다.
본문의 베드로가 일으킨 기적에는 그런 식으로 쥐어짜내는 모습이 전혀 없었었습니다. 혹시 쥐어짜내는 모습으로 일어난 이적이라면 사실은 인간의 공적이 그런대로 반영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한 순간에 일어나되, 엄청나고도 신비롭고 은혜로운 모습입니다. 인간의 노고가 조금이라도 원인이나 결과가 되는 모습과는 전혀 구별됩니다. 지금은 베드로로선 성령의 거슬릴 수 없는 흐름에 자연스레 편승한 것뿐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됩니까? 어떤 중병에 걸렸거나, 큰 문제가 닥쳤을 때에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부분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내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또 얼마나 기도를 뜨겁게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는지부터 보셔야 합니다. 이 또한 단순히 죄만 회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역사를 그분이 자연스레 일으키게끔 성령의 인도에 과연 자신을 비워 내어드리면서 기다리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한마디로 진정으로 그분을 기뻐하는지 여부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병의 치유나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 미주알고주알 세밀히 아뢰며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어려운 사정을 모르실 리 만무해도 그래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진짜 모든 측면에서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만 믿고 기다린다는 표식입니다. 또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 내 모든 죄를 구체적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과 나와의 관계를 더 광범위하게 이해하고 또 그런 바탕에서 자기 전부를 그분께 온전히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내 쪽에 숱한 허물과 실수와 잘못과 죄악이 제거되지 않은 채 있어도, 그분이 원하시면 그분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의 역사를 정말 아름답고 신비하며 풍성하게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형편과, 심지어 믿음과도 전혀 무관하게 당신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당신만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다음 글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지만 단순히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그 목적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또 문제나 환난에서 그분만의 더 넓고 깊고 거룩한 뜻이 따로 있다면 우리로선 그 일을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기에 앞서 또는 동시에, 그저 자신을 성령의 인도에 내어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로 하나님은 무조건 옳고 선하다는 어떤 면에선 무식하고도 ‘X’배짱 같은 믿음을 갖고서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그분의 광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완전하심에 맞추어 나의 생각도, 더 정확히는 나의 정체성을 그분 품 안에서 더 넓고 크게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광대하심에 맞추어서 나 자신을(내 믿음이 아니라) 조금씩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믿음을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정한 종교적 행동이나 일로만 파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생각 속에 이뤄지지만 여전히 행동이자 일입니다.
요컨대 특정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기도응답보다, 평소 하나님 그분을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또 개별 환난이 닥칠 때마다 내 믿음을 강하게 키우기보다는, 광대하신 그분께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바치는 믿음, 사실은 이미 전부 바쳤음에 전혀 후회 없는 믿음을 항상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성령의 인도에 자연히 따름으로써 문제는 어느 듯 선하게 해결되어 있거나, 문제 자체가 더 이상 전혀 문제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2011/7/1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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