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행3:6-8)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를 말씀 한마디로 낫게 하는 기사를 보면 우리의 관심은 솔직히 오직 주님의 그 크신 능력에만 쏠립니다. 한 명의 예외 없이 신자라면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는 영적 진리 하나는 주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크고 풍성한 은혜를 받기를 소원합니다. 꼭 풍요롭게 살려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 병이 들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만이라도 그 고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는 결코 나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여지는 있습니다.
만약 그 때에 마침 베드로에게 은과 금이 있었다면 사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전도하러 가기 바빴으므로 아마 동전 몇 닢 던져주고는 지나쳤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금 덩어리를 받는 것보다 평생 불구가 낫는 것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기에 앉은뱅이로선 베드로에게 돈이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던 셈입니다. 그로선 평생의 한이자 가장 필요했고 소원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요? 나면서 앉은뱅이란 오늘날도 치료가 전혀 불가능합니다. 본인으로선 낫고자 하는 소원이 전혀 없었고 아예 상상도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저 타고난 팔자거니 체념하고 살았으며 또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에게 단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만 보았습니다. 또 전후 기록상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혹여 들었을지 몰라도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처음 베드로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에 그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돈이 없으면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왠 잔소리냐?"라고 짜증부터 났을 수 있습니다. "어쩐지 행색이 초라하더니 역시 돈 한 푼 없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갈릴리 어부 출신의 베드로인지라 외양으로는 별로 있어 보이지 않았을 것이므로 혹시나 하고 쳐다본 것입니다.
그런 실망스런 기분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르긴 해도 다리의 모든 근육과 발가락에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관절에 뭔가 뜨거운 기운이 지나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엉덩이가 자기도 모르게 들썩였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도 신비한 힘이 자기 전신을, 특별히 하반신을 붙들고서 서서히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또 그 힘에 전혀 항거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일어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한 발자국 옮겨 걷거나, 조금 빨리 뛰는 일도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에게 아직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분에게 간구하면 앉은뱅이도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했고 그런 소원조차 없었습니다. 그날도 오로지 동냥을 더 얻을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본인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진짜로 얼떨결에 죽을 때까지 붙들려 있었을 불구가 단번에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불구가 나음으로써 그에게 진짜 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평생을 두고 성전 미문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예배드리러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을 것입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불구는 부모나 자신의 죄로 저주 받은 양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어서 구원과는 아예 거리가 먼 자였습니다. 비록 그가 구걸은 해도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던 반면에 자신이 나면서부터 저주 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뼈 속 깊이 파묻혀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육신의 불구가 풀림으로써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마음껏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은과 금이 풍부히 있는 것보다 육신의 불구가 나은 것이 더 좋았습니다. 또 육신의 불구가 나은 것보다 영혼에 찍힌 주홍글씨가 벗겨진 것이 더 가슴에 벅찼습니다. 당연히 앞으로는 남에게 빌어먹고 살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영혼육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거기다 이 불구자 한 명의 기적적인 나음은 근처에 있던 많은 이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9,10절)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기적적 치유의 궁극적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이들로 그 일어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궁극적 목적이란 그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이미 달성된 다른 것들도 사실상 다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요컨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크고 신비한 권능을 사용함에 있어서 첫째 목적은 그 은혜 받은 자의 변화된 모습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로 당신을 알고 믿게, 최소한 기이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권능이 일으키는 결과를 그 중요한 순서대로 열거하면, 불신자들로 당신을 인정케 함, 당사자의 완전히 변화된 모습, 하나님께 감사 찬미함, 영혼의 구속을 얻음, 육신의 묶임에서 풀림과 같이 됩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그분에게 바라는 것들의 순서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바라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육신의 불편함을 아주 기적적인 방식으로 제거해 달라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조금 믿음이 좋은 자라 해야 태반의 목적을 차지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단지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과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입니다. 본문처럼 불신자가 소원조차 하지 않아도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치유, 회복 시켜주지 않습니까?
신자가 믿음으로 정작 할 일은, 특별히 고난 중에 있을 때에는 더더욱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잘 믿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생기는 것도 기이한데다, 당연히 아주 힘들어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믿음으로 회복의 소망을 절대 잃지 않고 잘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찬미하고 오히려 주위의 더 힘든 사람을 섬기며 위해서 기도해주는 우리 모습을 보고선 주위 사람들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사 안일할 때에 시간과 재물을 과연 어디에 소비하는 지가 참 믿음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고난이 닥치면 소유 여부와 크게 상관없이 믿음이 어느 단계에까지 성숙되었는지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역으로 말해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유달리 고난이 더 많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이루도록 부름 받았다는 뜻인 것입니다
당신은 솔직히 어느 쪽이 더 좋습니까? 하나님의 권능으로 은과 금이 더 채워지는 것과 고난 중에도 이웃들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 중에서 말입니다.
2011/7/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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