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을 오랜 역사를 통해서 가져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누구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는가, 또는 어떻게 살고 있나와 같은 것들이다. 크리스챤들은 말할 것도 없이 성경에 의거,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거룩하고, 의롭고,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존재자로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인지 정말 믿는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에, 일대 혼란을 불러 일으킨 학자가 있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1809~1882)이다. 그는 ‘종의 기원’ 같은 연구를 통해 인간은 멀고 먼 어느 시점에 유인원(원숭이의 일종)으로 부터 가장 지능이 발달한 돌연변이 상태로 진화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말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연 우주만물들의 존재와 더불어 인간의 기원, 즉 창조론에 대해 못마땅해 하거나, 마지못해 억지로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윈의 진화론은 그야말로 그들의 합리적 진리가 되고 말았다.
사실, 다윈의 사고와 연구방식도 16세기 이후, 경험 및 실증주의를 거치면서 나오게 된 것인데, 눈으로 보아야 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속 시원하게 의심을 해결 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 에게 진화론은 그들의 경전적 이론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자유로운 신앙을 강조하던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중반, 그 이후의 교육 내용에 절대적인 진리로 낙점되어 있는 상태다.
근자에 이르러, 또 한번의 창조론을 뒤덮는 큰 파도(Big wave)가 밀려왔다. 성경의 창조론을 뒤덮는 다윈 이후 두 번째 파도다. 레바논계 유대인을 부모로 둔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1976)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인간 시초에 대해 창조론을 지지하는 기독교교인들과 진화론을 강조하는 지지자들의 견해들을 다시 공론장으로 불려들여 창조론을 무력화 하고, 진화론을 강화시키려 하는 그런 입장으로 나타났다.
그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썼는데, 그 책에서 AI 같은 인간의 과학기술은 신의 경지에 이를 만큼 발전되어 있어서 어느 시점에 인간은 과학기술에 완전히 지배받는 존재, 나아가 과학기술에 의해 죽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유전공학이나 AI같은 기계를 사용하여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과학기술의 목표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하려 하는가 하는 것을 간파하게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책은 ‘싸피엔스(Sapiens)’다. Sapiens란 말은 ‘슬기롭다’ ‘지혜롭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호모 싸피엔스’ 하면, ‘슬기로운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서 오늘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단어 자체만으로는 기존 학문세계에서 흔히 쓰는 것이기에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하라리의 인간이해다. 그 역시 인간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싸피엔스’ 책에서 그는 지구와 인간 시초에 대해 말한다. 수 백만년 전, 지구는 빅뱅에 의해 조성 되었으며, 빅뱅 후 30만 년에는 어떤 물질과 에너지가 발생하였고, 여기서 원자가 나타났고, 원자는 분자를 생성하면서 각 종 생물들과 동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주장한다. 인간은 그 시기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암컷 유인원에서 침팬지가 나오게 되고, 그 침팬지에서 좀 더 지능적으로 진화된 것이 인간이 되었다 한다. 결국, 어떤 돌연변이로 지능화된 침팬지가 인간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다.
하라리는 인류역사 시기를 3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인지혁명’, 두 번째 ‘농업혁명’, 세 번째가 ‘과학혁명’이다. 인지혁명으로 지능화된 침팬지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에서 점차적으로 인지하는 기능이 발달하여 지금과 같은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기능 혁명은 과학혁명의 시기를 이끌어 냈고, 점차 더 발전하여, 죽지 않는 인간으로 과학은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며, 결국 인간은 신이 되게 되라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인간 진화론자들의 진화론은 무수한 비논리, 비과학, 비생산적 이론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들이 말하는 인류 역사의 시초는 정말 믿을 수 없다. 기준점이 없고, 일관성도 없고, 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도, 신학의 이름으로 진화론의 강직한 주장을 좀 완화시켜 보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데,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일환으로 보는 데서 시간, 창조 순서, 과정, 하나님 창조의 목적 등에 불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 성경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는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진화를 통해 변화하는 것으로서 창조가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는 변화하는 기능을 이미 부여하고 있어서 변화적 창조가 아니라, 이미 창조된 창조속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이는 원숭이 DNA가 변하여 인간 DNA로 변한다는 그런 논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논리를 넘어서는, 창조위에 어떤 논리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에 제한이 없다. 무엇인가 조작하고(나쁜 뜻이 아님, 조직과 같은 뜻), 갖다 붙이고, 논리정연하게 하여 학설을 만든다. 학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다윈이나, 하라리 같은 경우, 하라리 그 자신이 유대인 출신이면서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구약성경의 진리, 특히 창조이론을 부정하는 진화론적 관점을 유지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세속학문이 얼마나 강하게 신의 섭리세계와 학문의 세계를 침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들은 과학을 그들의 신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이미 오래 되었다. 무엇이나 알기를 원하고, 무엇이나 그 앎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심지어 신까지 지배하려는 인간의 영적 탐욕, 그것이 현대판 바벨탑이다. 영원히 서게 될 것인지, 피사의 탑처럼 기울어진 모양을 할 것인지, 아니면 어느 시점에 무너질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탑을 흩트려 놓으셨다 하는데, 언젠가는 이처럼 무너져 종말을 고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진화론적 과학혁명의 유신진화론과 소수인권을 빙자한 동성애는 21세기 현대판 바벨탑임을 강력히 경고하며 복음주의 신학과 교회의 단호한 대처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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