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근 목사
김재근 목사가 한국전쟁 당시 전우들과 군인 교회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재근 목사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인터뷰 도중 ‘전우여 잘 자라’를 부르며 당시 전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육군 군종장교 제7기 예비역 김재근 목사다. 김 목사는 1930년 출생으로 올해 94세를 맞았다.

김재근 목사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도중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적을 전했다. 그는 “8사단 소속 군종목사로 양구·화천 일대에서 전투에 임하던 도중 중공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 바윗돌에 숨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를 제외한 전우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사단 전체가 타격을 받아 사상자가 수천 명이 발생했다”고 술회했다.

이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 51편 15절)는 성경 구절로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며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보호하신다고 병사들에게 강조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비둘기 부대 소속 당시 소령 계급의 군종목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도 전했다. 그는 “당시 이동하는 길목 곳곳엔 크레모아(Claymore) 지뢰 다수가 매설됐다. 저는 길목을 지날 때마다 하나님께 ‘지뢰가 터지지 않고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로 인해 전쟁 내내 길목을 수없이 지났어도 지뢰가 터지지 않은 채 안전히 통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재근 목사는 한국전쟁 도중 군종 전도사 제도를 처음 만든 장본인이라고 했다. 그는 “당시 사단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사단장께 이 제도를 만들면 병사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더 많이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단장께서 허락하자 이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연대와 대대에도 군종목사 대신 전도사를 파견할 수 있게 되면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고 했다.

김 목사의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전쟁 동안 8사단 내 신자는 200명에서 8,000명으로 증가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목사가 된 참전용사는 총 8명이었다고 한다. 김 목사는 또한 1977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육군 제1107야공단과 육군 제181정양병원에 교회를 건립했다. 또 예편 이후 민간 목사로 활동하는 동안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영광교회를 개척했다.

김재근 목사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은 대한민국이 지금의 선진국이 된 데는 순교자들의 피에 빚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866년 조선에 복음을 전하러 온 영국 출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이후 언더우드·아펜젤러 등 서양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병원과 학교가 건설되고 비로소 조선이 개화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일제 치하 당시 주기철·손양원 목사 등 순교자들이 한 알의 밀알로 희생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며 “이런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재근 목사는 지난 삶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충성된 삶이었다고 고백했다. 김 목사는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를 암송했다. 국가유공자인 김 목사는 부인과 함께 머무는 10평 남짓한 작은 빌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비한 천국의 집을 소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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