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 영성, 용기, 정의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말해야 하는 3가지 요소가 없다. 역사의식, 윤리의식, 책임의식이 없다. 꼭 가지고 있어야 할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어느 사회든 이 3 가지를 갖지 못하면, 국민들이 바른 사고관을 갖지 못해 각종 사회적 문제점들이 만연하고, 국가 기강이 약해진다. 경제나, 정치, 또는 군사력이 국가의 대표적인 힘이지만, 그러한 외적 요소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국민들의 통합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종교의 힘, 즉 기독교가 그 요소들이 가져야 할 의식들을 지지해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구약의 사무엘이 한 일을 예로 들어 보자. 당시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였다. 그때는 통합된 체계가 아니어서 12지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지도자가 없었다. 지파는 지파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제 각각이어서 그 결과 야훼신앙의 무너짐은 말 할 것도 없고, 온갖 우상숭배와 악이 만연했다. 특히, 우상숭배가 심했다. 첫째, 하나님의 인도로 출애굽 하는 그렇게 큰 역사적 기적을 체험했으면서도 야훼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고, 둘째, 출애굽 한지 40여년 이상 지났어도 이집트 생활정신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으며, 셋째, 또한 가나안 점령 후 주변 국가들의 각종 우상숭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블레셋의 침략이 자주있어 매우 불안한, 위기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사무엘이 미스바 각성집회를 전 국민대상으로 열었다. 그 내용은 삼상 7:3에 나온다. 이스라엘민족이 야훼께로 돌아 올 것을,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오로지 야훼 하나님만 섬길 것을 말하였다. 이에 모두 회개하고, 야훼신앙만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바로 여기서 부터 세워지게 되었다. 첫째, 회개로 우상숭배 근절하고, 둘째, 오로지 야훼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갖도록 했으며, 셋째, 이는 이스라엘민족의 신앙으로 인한 정신통일을 가져왔고, 넷째, 전 국민이 신앙과 정신으로 하나가 되어 있어서 국가를 설립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앙바로 세워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반대로, 북조 이스라엘이나, 남조 유다가 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들 모두 우상숭배가 심했다는 것이다. 아합왕 시절에는 왕의 아내 이세벨이 이방여인으로서 자신이 믿던 우상을 그대로 가져와 믿었으며, 심지어 왕궁에 바알이나 아세라 우상숭배 지도자들을 불러 제의식을 집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히려, 야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멸시하여, 그야말로, 야훼신앙이 멸절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엘리야가 우상숭배자들 850: 엘리야 1명으로 싸워 해결했던 내용으로 성도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성경 전체를 보면, 지도자들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배교, 즉 우상숭배가 심했으며, 이에 대한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 그래도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믿음을 잃어 버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북조는 앗시리아에게, 남조 유다는 신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없어져 버리게 된 것이다.
우상숭배금지는 십계명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쉼 없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인데 이 가장 핵심적인 계명이며 강령인 우상숭배를 끊지 못했으니 망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다.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근자에 이르러 한국사회에 무속신앙이 암세포처럼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종교학이나 사회학에서는 무속을 종교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윤리의식, 역사의식, 사회적 책임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로서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조건, 즉 조직체계, 일관된 교리, 역사관, 윤리관 같은 것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속은 가장 하등신앙 일종이다. 고대부터 가난하고, 무지했던 극 서민층들은 발달된 종교에 접근하기 어려워 개인차원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이 무속이다. 무속신앙이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정신이 추락돼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영조 이하 정조때는 무당들을 국명으로 잡아들여 무속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실학이라는 현실주의에 반하는 것으로서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 비창조적 이어서, 그만큼 운명론(Fatalism) 이나, (운명)결정론(Determinism)에 빠져 들게 하므로 백성들의 정신을 훼파, 추락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21세기 이성과 과학이 시퍼렇게 살아 발달된 이런 사회에 무속신앙이 난무하는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가?
이렇게 무속신앙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 기독교교회 목사들이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만큼 사람들의 정신적 필요성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거리마다 점술 집, 지방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지식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서울 강남 한 복판에서 무당들의 굿판 같은 주술이 횡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책임도, 반응도, 대책도 없는 것 같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 중심의 역사, 윤리,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데, 오늘날의 교회 목회자들이 맹목적성 믿음만을 말하고, 죽어서 천당간다는 15세기 하나님 나라 개념을 아직도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있고, 교회 싸이즈에만 관심을 갖고 있으며, 어떤 이는 복음전파 사명은 버리고 정치판에 기웃거리고 있으니 목회자나 교회가 제 기능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이시대는 엘리야나, 선지자가 절실한 시대이다. 선지자라는 말은 특별한 것 아니다. 처음부터 이름 가지고 태어 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의식, 윤리의식, 책임의식을 일깨워,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진 인간다운 면모를 갖게 해 주는자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정의를 실현할 용기있는 지도자가 예언자고 선지자다. 또한,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세상정치, 철학, 종교논리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어느 개인이나,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케 하는 자가 선지자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지금 찾고 계신다. 이사야 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인물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용기있는 단 한사람만 있어도 기독교 교회는 3무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열왕기상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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