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미국 변호사) ©이태희 목사

최근 한 성도가 필자에게 유투브 영상 한 편을 보내주었다. 필자와 오랜 친분이 있는 분의 유투브 영상이었다. 자신의 유투브 방송에서 주장한 내용은 한 마디로 이것이었다. “로잔대회는 곧 종교통합주의 운동이다!”

나는 곧바로 그 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카톡을 보냈다.

“대표님, 평안하시죠? 최근에 우리 성도들 가운데 한 분이 보내준 대표님의 로잔 관련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표님의 개인적인 의견과 추론은 존중하지만, 그러나 많은 구독자들이 대표님의 영상을 보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우리 성도들도 있기 때문에 저희 성도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대표님의 입장이 갖고 있는 “일반화의 오류”를 성도들에게 지적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잔 운동은 복음주의 선교 운동이라고 하는 큰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참조하실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이후 필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보내셔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보냈다.

1. 로잔대회의 유익은 무엇인가?

로잔대회의 유익은 일단 로잔대회의 목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잔대회는 그리스도의 몸 된 세계교회가 “복음주의”라고 하는 가장 본질적인 신학적 테두리 안에서 세계복음화를 위해 함께 연합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대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인종이나 국적의 차이만큼, 교리적인 차이와 정치적인 차이가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차이를 넘어서 “그리스도 중심”, “복음 중심”, “성경 중심”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인 “세계 복음화”라고 하는 일치된 사명을 위해 연합하고자 하는 것이 로잔대회의 주목적입니다.

대표님께서도 주지하다시피 “연합”과 “통합”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 교회 이웃에 위치한 다른 교회와 “연합 축구대회”를 개최한다고 해서 그 교회와 우리 교회가 “통합”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또한 제게 “로잔대회에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질문하셨는데, “로잔대회에 어떤 유익이 있는가”와 “로잔대회가 WCC와 같은 종교통합운동인가”의 문제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설령 로잔대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해도 로잔대회가 WCC와 같은 종교통합운동인 것은 아닙니다. 로잔대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주장은 관점에 따라 가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로잔대회와 WCC가 다름이 없다는 주장은 “연합운동”과 “통합운동”의 차이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로잔운동은 “세계선교”라고 하는 지상 명령을 위해 “복음주의”라고 하는 배타적인 틀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교리적 차이를 “포용”하는 가운데 세계 교회가 “선교”라고 하는 일치된 지상 사명을 추구하기 위한 “세계선교연합” 운동입니다.

반면에 WCC는 연합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인본주의적이고,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통합 운동”입니다. 비빔밥은 “연합”이고, “통합”은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 모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굳이 비유로 말하자면, 로잔 운동은 “비빔밥”이고 WCC는 이것 저것이 섞여져 버린 “쓰레기”입니다. 아무리 비비고 섞어도 “레시피”에 따라 비비고 섞으면 “요리”가 되지만 레시피없이 무작위로 비비고 섞으면 “쓰레기”가 됩니다. 레시피는 “복음주의”입니다.

(로잔 언약 참조: https://lausanne.org/ko/statement/lausanne-covenant-ko)

특별히 4차 로잔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이 뜻깊은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과 세속화의 물결, 동성애 합법화를 비롯한 적그리스도적인 문화정치적 흐름이 쓰나미처럼 세계 교회를 뒤덮고 있는 상황 속에서, 로잔언약에서 천명하고 있는 복음주의적인 세계 선교의 사명을 위해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2. 로잔의 복음 전도에서 이야기하는 사회적 책임 개념에는 위험성이 없을까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가운데 무엇이 우선성을 지니는가에 관한 것은 저 개인적으로 불필요한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육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더 우선시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육의 양식의 필요성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가운데 영의 양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영과 육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영의 양식” 없이 “육의 양식”만으로는 살 수 없고, 반대로, “육의 양식” 없이 “영의 양식”만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물론 “영의 양식”이 더 중요합니다. “육의 양식”은 영생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두 가지 양식 가운데 무엇이 인간에게 더 필요한가? 그것은 그때 그때 달라집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당장 “영의 양식”보다 “육의 양식”이 더 필요할 수 있습니다. “육의 양식”이 없는 자에게 “영의 양식”은 “울리는 꽹과리”와 다를 바 없이 들릴테니까요.

우리 북한 동포들에게 “자유”가 더 중요할까요 “복음”이 더 중요할까요? 당연히 “복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지금 당장 “자유”가 더 필요할까요, “복음”이 더 필요할까요? 물론 개별적인 상황마다 답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자유”가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없이는 “복음”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선교 사역에서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만이 아니라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가난으로부터의 구원,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을 함께 의미했습니다.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적 구원이 함께 했던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사회적인 저주는 인간의 죄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죄 사함과 더불어 사회적인 구원이 함께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가 우선이냐 사회적 책임이 우선이냐? 그것은 제 생각에는 불필요한 논쟁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해야 하고, 또 항상 함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로잔 언약은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훼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도의 필연적인 파트너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처한 정치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사회적 책임이 더 우선시 되거나 더 중요시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심각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는 교회의 경우에는 일차적으로 먼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선교적인 책임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일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 전도”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모든 것이 평화롭고 부유한 상황 가운데 있는 교회에게는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가 그들의 주된 선교적 책임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누리는 부요와 평안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세계교회는 물론 한국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매우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원론적인 관점으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소위 “영혼 구원”만(?)이 교회의 사명인 양 오해했던 많은 한국 교회는 북한 동포들의 비참한 상황에도 이해할 수 없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들이 많았고, 동성애와 차별금지법과 같은 적그리스도적인 문화 흐름에 대해서도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또한 개교회의 교세 확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로잔 언약이 표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은 한국교회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로잔운동을 시작한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 한국 로잔대회를 추진하고 있는 유기성 목사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나 존 스토트 박사님, 그리고 유기성 목사님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호불호가 있고, 또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비판의 여지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복음주의”라고 하는 큰 틀 속에서 보면, 이 분들은 얼마든지 존경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이 사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분들은 아니기 때문에 이 분들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반대로 이 분들의 주장이 항상 완벽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로잔운동과 이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 역시 WCC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은 상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상태는 아닙니다.

사실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겠죠. 그러나 아직까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제 자신이 변질된 상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령 최악의 경우에 변질이 된다 해도 “변질 전”과 “후”는 엄격히 구분해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변질 전 상태”와 “변질된 상태”를 동일시 하게 되면 세상에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겠죠.

성실하게 답변을 드리려다 보니 글이 좀 길어졌네요. 제 개인적인 소견이니까 참조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말씀 구절로 마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항상 강건하시고요, 조만간 또 뵐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합니다. 항상 응원하고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막 9:38-41)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 9:33-42)

이태희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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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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