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넘어뜨려 대승을 거둔 목동 다윗은 단번에 왕국의 영웅이 되어 백성의 칭송을 한 몸에 안았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러나 이러한 칭송이 왕국 전체에 퍼지자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울왕의 영혼에 시기심이 불타오른다. 그는 다윗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으로 살기등등해진 미친 사람이 되고 만다. 목동 다윗의 인생은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덮이듯 전환되어, 살기 위해 몸 숨길 곳을 찾아 산과 들을 달리고 바위 동굴을 찾으며 골짜기를 헤매야 했다.
다윗처럼 차기 왕권을 눈앞에 둔 모세 역시 동족을 핍박하던 애굽 노예 감독을 살인한 후에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다.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가문에 들어간 것이다. 투트모세 Ⅰ세 28년(아멘호테프 Ⅰ세로 40년)에 늙은 파라오는 자신이 임종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투트모세 Ⅲ세를 투트모세 II세(모세)의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투트모세 II세는 양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즉시 황제 파라오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투트모세 II세(모세)는 기원전 1486년 투트모세 Ⅰ세(아멘호테프 Ⅰ세)가 1484년에 죽었을 때 왕좌를 위한 공석을 남기고 미디안으로 도피한 것이다.
이 글에서 독자들은 40년 주기로 전혀 다른 모습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그리스도 삶의 전조(前兆)가 된 모세의 삶에 대해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모세의 왕궁 생활에 대한 보다 상세한 자료, 곧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로 이집트의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출애굽의 자료를 보게 될 것이다. 본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책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Mary Nell Wyatt, 리진만 역) 번역본을 주제별로 발췌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것은 성경 기록의 주요 사건이다. 동상과 비문 기록이 시사하는 바는 모세가 도망치기 직전까지 양조부와 양어머니 모두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져, 차기 황제 파라오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파라오가 히브리 노예를 학대하던 이집트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모세의 두려움에 자극을 더했다.
출애굽기 2:11 세월이 지나, 모세가 어른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바깥으로 나가 동족에게로 갔다가,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12 좌우를 살펴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 버렸다. 13 이튿날 그가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오?” 14 그러자 그 사람은 대들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 모세는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다. 15 바로가 이 일을 전하여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 쳐서, 거기에서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우물가에 앉아 있을 때이다.
모세가 이집트 북부를 방문하고 있을 때, 그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보러 나갔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북쪽 삼각주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양조부인 파라오가 그와 함께 멤피스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테베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제기한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완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여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겠다. 우리가 들은 것은 모세가 파라오의 반응을 두려워하여 도망쳤다는 것뿐이다.
모세가 바로를 두려워하여 떠났을 때 이집트의 왕족과 왕국 구성원들은 혼란과 분노와 슬픔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핫셉수트의 마음은 확실히 상했다. 파라오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슬펐다. 모세가 핫셉수트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지 아닌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늘날의 영국 군주국과 마찬가지로 이집트도 굳은 윗입술을 유지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고대 기록에 따르면 투트모세 II세에 대해 공개적으로 나쁜 말은 없었다. 그는 적어도 토스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파라오는 모세 탈출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토스 신에 대해 모욕이었을 것이고, 아마도 왕실에는 매우 큰 굴욕이었을 것이다.
모세는 그 나라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홍해의 아카바만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여행했다. 그런 다음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미디안으로 갔다. 모든 이집트와 북쪽의 가나안, 시리아, 레바논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틀림없이 그를 알아보았거나 적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모세는 지난 28년 동안 아첨과 칭찬이 쏟아지는 궁전에서 보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었다. 그는 원하는 것이 없을 만큼 풍요롭게 살았다. 그는 자신이 그의 백성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 그분의 백성을 구출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낯선 땅으로 여행하면서 모세의 마음이 어땠는지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미래 왕의 상실 처리
모세가 도망쳤을 때 다시 문제가 생겼다. 핫셉수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왕좌를 차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투트모세 Ⅰ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가 30세였다면, 그는 이제 71세였으며, 여전히 파라오가 살아 있고 건강을 유지하기에 괜찮은 나이였다.
내가 1990년대에 찍은 어린 소녀와 어린 소년을 보여주는 제서 제세루(Djeser-Djeseru)의 벽 사진으로 판단하면 핫셉수트는 기껏해야 모세보다 12~14살 더 많았다. 이것은 모세를 구출했을 때 그녀가 어린 10대였고, 그가 도망쳤을 때 최대로 봐도 54세였음을 의미한다.
투트모세 II세(모세)가 죽은 것으로 묘사됨
윌리엄 에저튼은 핫셉수트의 아버지인 투트모세 I세와 투트모세 II세가 단순히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위대한 신의 면전에서 의롭게 된’ 것으로 특정되는 첫 번째 성소 방의 두 개의 긴 벽에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설명했다. 다른 죽은 가족과 함께 그들은 서쪽(죽은 자의 거처)에서 아문 밖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왕가가 모세(투트모세 Ⅱ세)를 죽은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그의 탈출을 처리했다는 증거로 제기한다. 이것은 왕과 핫셉수트의 굴욕을 제한하고 대중으로부터 진실을 지켰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미국 주변 세계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역사의 증거를 제거하려고 애쓰며 열광적으로 시도했다. 조각상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있다. 일부 문명이 인식한 역사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투트모세 Ⅱ세의 기억은 절대 공격받지 않았다. 기록은 거의 없지만 학자들이 인식하는 그림은 그가 일찍 죽은, 병치레하고 약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 계획에서는 다른 시나리오가 나타난다.
투트모세 Ⅲ세는 모세의 공동 섭정이었다
파라오 투트모세 Ⅰ세는 빈 왕좌에 노출된 나라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멤피스에는 이미 모세의 공동 섭정으로 선출된 청년이 있었다. 증거는 그가 모세가 도망치기 1년 전에 공동 섭정의 직책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는 모세가 수석 파라오의 지위로 올라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늙은 파라오는 자신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핫셉수트를 통해 모세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실행된 계획은 이제 이 젊은이를 그의 위치에 배치하는 데 사용되었다. 핫셉수트가 그의 섭정 기간을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 당시에 어렸다는 것을 안다. 그가 아멘호테프 Ⅱ세가 되었을 때, 그는 18세에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에 관한 비문을 남겼다.
그가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을 때, 투트모세 Ⅲ세는 핫셉수트 재위 22년에 그의 재위 연도를 시작했는데, 이는 연속성을 제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핫셉수트 통치 1년 차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독특한 상황이다. 재위 54년에 겨우 50세 혹은 51세였다. 이것 또한 큰 혼란의 원인이 된다.
증거는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기 직전에 다음 세대가 통합된 이집트와 투트모세를 통치할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투트모세 Ⅲ세는 투트모세 Ⅰ세(아멘호테프 Ⅰ세)가 죽을 때까지 일어날 수 없었던 모세의 마지막 왕위 계승을 준비하기 위해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투트모세 Ⅰ세 치하에서 이집트는 평화와 번영 속에 살았다. 비문에 따르면 모세는 투트모세 Ⅱ세로서 필요할 때 출정에 참여했지만, 군사 확장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힉소스족이 추방된 후 이집트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다. 힉소스족은 가나안, 시리아, 레바논에 정착했다. 이집트는 그들을 속국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들 나라에 군대를 배치했다.
전사 파라오
한동안 모든 것이 평온했지만 핫셉수트 22년에 투트모세 Ⅲ세가 투트모세 Ⅱ세의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자, 그는 즉시 심각한 봉기를 처리하기 위해 므깃도로 첫 군사 작전을 떠났다. 새로 임명된 투트모세 Ⅲ세는 전쟁에 나갔을 때 멤피스를 떠나 자루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곳의 요새는 군대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장비를 갖춘 무기고 역할을 했다.
봉기의 지도자는 가데스의 왕자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도시 국가 330명의 통치자가 뒤따랐다.
그러나 모든 가신이 봉기에 연루된 것은 아니다.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의 아르만트 비석(Armant Stele)은 그가 “그곳에 있던 반군을 죽이고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주기 위해 자히(Djahi) 땅으로 가는 동안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체 출정은 아문의 카르나크 사원 내부 벽에 있는 그의 연대기에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므깃도에서 그의 포위 공격은 7~8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압도적으로 성공했다. 그가 기록하기를 방백 중 몇 사람은 전쟁과 포위가 끝난 후에 풀려났고 “그들이 나귀를 탔으니 이는 내가 그들의 병거를 빼앗았음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이집트에 대항해 싸운 연합군에 속해 있던 여러 나라 통치자의 자녀들과 아내들을 데려갔다. 그 사람들은 “카르나크에 있는 그의 아버지 아문의 노역소를 채우기 위해” ‘살아있는 죄수’로 끌려갔다. <계속>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사진) 번역: 리진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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