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의 육신을 죽여야 당신이 살게 됩니다. 옛사람을 죽여야 새사람이 됩니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육신의 일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일은 세계의 다른 민족에 비해 유달스럽고 지나친 일로 보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식 사랑입니다. 어떤 부모는 오직 자식 때문에 살고 죽는 것 같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에 사는 그리스도인 부모들과 한국의 부모들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에 대한 여러 실험과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단 하나에 있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부모들은 철저하게 자식들이 하나님의 소유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한데 반해, 한국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로는 그리하지만 실제로 늘 “내 자식”이라 부르며 “자식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가슴이 아프지 않은데 자식이 조금만 아프다 하면 속이 쓰리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자식을 양육하는 가정의 행동 양식과 지침들이 판이합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듯이 자식을 기릅니다. 모든 뒷바라지를 부모가 당연히 해 주어야 한다는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심지어 군대에 간 아들을 돌보고자 군대 주변의 집을 빌려 사는 엄마도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독립심과 자립심을 가지지 못하고 자력으로 무엇을 성취하는 일에 매우 미숙한 의존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런 어른을 ‘성인 아이’라 부릅니다. 몸은 다 컸는데 정신세계는 여전히 아이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수준에 갇힌 채 평생을 다른 사람을 속 썩이고 괴롭히다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식을 키우는 일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적 자식 양육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두 자녀를 입양해 화제가 되고 있는 배우 신애라 씨는 다니엘 기도회 특강을 통해 다음 네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첫째, 부모가 성경적 부모교육의 원리를 알아야 하고,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아이의 부모로 택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셋째,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쳐 행하게 하는 것이며 넷째,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을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아이가 되도록 길러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가 자녀를 잘 키우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과 기도밖에 없고, 자식들을 성경적으로 양육하는 것은 노아의 방주를 짓는 것과 같다고 피력했습니다. 이렇게 자식을 잘 키우는 일이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4. 결어
오늘날은 어떤 시대입니까? 많은 육신들이 새사람을 괴롭히는 시대입니다. 수없이 많은 옛사람들이 교묘하게 겉모습을 꾸미고 위장하여 새사람처럼 행세합니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육신적인 일들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추구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세속주의’라 부릅니다.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은 오직 이 세계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하늘의 일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토저 목사가 주문했듯이 만약 당신이 지나치게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다면 “당신의 자아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라”고 요청합니다. 그럴 때 자아가 쉿- 하고 바람 소리를 내며 빠져나갈 것입니다.
육신의 일에서 멀어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하는 사람과 자주 접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술꾼하고 친하게 지내면 술꾼이 됩니다. 공부하는 친구들이 아니라 ‘놀자파’ 친구들과 사귀면 자신도 어느새 ‘길거리파’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을 소망하고 거룩한 인생이 되기 위해 모든 신령한 일을 다 행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세상적인 생각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잠자는 육신의 모든 일을 억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억제하다’라는 영어단어 ‘mortify’와 ‘영안실’이라는 영어단어 ‘mortuary’의 라틴어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즉, 이 두 단어에는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억제하는 것은 육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거룩한 척 하십니까?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마음 속에 여전히 불만과 원망과 분노와 짜증이 남아 있습니까? 여전히 예배석에 앉아 세상일을 모의하고 구상하고 세상적인 성공을 꿈꾸고 돈 걱정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육신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이 당신을 죽이고 말 것입니다.
육신을 죽이는 길이 곧 진정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무엇보다 당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될 때, 열심히 일하다가도 주일이 기다려질 때, 속히 하나님의 설교를 다시 듣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당신의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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