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까?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문제는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주님을 믿고 영접하고 회개를 했고 죄 사함을 받았으며 구원 자격증을 취득하여 성령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을 걸으며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계속 죄를 짓는 것입니까? 아침마다 기도하고 아무리 다짐하고 가슴을 치며 나쁜 습관의 죄들을 멀리하고 없애려 해도 낮이나 밤이나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고 맙니다. 자,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짓는 이 죄를 어떻게 다스리고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것을 우리가 완전하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하심을 아시고 우리가 계속해서 같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우리가 완전해지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도중에 있습니다.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하여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고 죄에 대해 방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불순물과 오물들과 쓰레기들이 즉시로 치워진다 해도 하루아침에 그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악 된 길에서 멀어진다 해도 여전히 죄를 향한 강한 경향성이 우리 안에 남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리로 끌려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자신 안에 도사린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주님은 오직 이 일은 십자가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죽인 실존적 사건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새롭게 산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한발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오늘 소개한 본문 말씀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2:20)고 선언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와 함께 자아의 죽음을 믿고 선언할 때 이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아를 못 박는 다는 것은 또 어떤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소개한 본문 갈라디아서의 말씀에 따르면 바로 육체의 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육신을 억제하는 것, 즉 육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육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은 치와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과거부터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사에는 진짜로 이런 일을 추구한 교파나 일단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세상과 절연하고 육신을 죽이기 위해 기둥 위에다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가입하기 위해 반드시 십자가에 진짜 못이 박히는 과정을 겪어야 되기도 했습니다. 육신을 죽이라 했더니 자기 몸을 상해하거나 몸을 수련한답시고 극기 훈련한다고 가족도 버리고 산속에서 무엇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과거 수도사들은 육체의 일을 멀리하기 위해 자기 몸을 실제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고 고행을 거듭하며 자기 몸을 저주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웃지못할 해프닝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몸은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옷이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듯이 우리 몸은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초도덕적’인 것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너희 육신을 죽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 뼈와 살과 피를 없애거나 신체의 일부를 훼손한다거나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제압하고 오직 금욕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몸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을 죽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아, 우리의 옛사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악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신이 추구하는 모든 정욕과 탐욕과 우상 숭배 등의 모든 죄악 된 일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입니다. 고구마 줄기 뽑듯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악을 한꺼번에 다 뿌리 채 뽑아버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니면 앓든 이를 뽑아버리듯 모든 악의 찌꺼기들이 일거에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두 그렇게 시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육신의 일을 그렇게 처리하는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이야말로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의 존재를 사도 바울은 ‘옛사람’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이 존재가 거룩한 신앙의 길을 방해합니다. 바로 이 ‘옛사람’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괴롭힙니다. 한 마디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옛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육신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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