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 황경철 박사
황경철 박사.

4) 지시하는 설교가 아닌 공감하는 설교

코로나가 한국사회에 미친 가장 근본적인 영향 하나를 꼽는다면 “초개인화”이다. “격리”, “거리 두기”가 방역과 안전을 이유로 정당하게 강요되었고, 국민은 타당하게 수용하였다. 결과는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 우울감 수치는 올라갔고, 국민 가운데 우울증 치료환자도 급증하였다.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며, 우울하고, 예민해졌다. 그러한 감정을 지닌 사람들에게 설교는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까? 앞서 세 가지 항목이 설교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라면, 네 번째 항목은 설교의 방식 또는 자세와 관련된 것이다.

아무리 옳은 내용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 전달방식이 지시나 강요라면 청중은 마음을 닫게 될 것이다. 청중에게 무엇을 지시하기 앞서, 청중의 마음을 살피고 돌보는 공감적 설교기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꼭 청중의 구미를 맞추는 인본주의적 설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그들을 배려하고 공감하며 복음을 전달할 수가 있다. 예수님도 죄인 된 우리를 공감하시기 위해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을 입어 종의 몸으로 오셨다(빌 2:6~8). 그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공감하고 체휼하시는 분이다(히 4:15). 성도들은 지시적, 권위적 태도에서 벗어나 복음을 공감이라는 그릇에 담아 전달하는 설교자에 목말라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감적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회자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성육신적 노력을 설교문 작성뿐 아니라 심방과 회의, 의사결정 전반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아는 한 목회자는 성도들의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자살 예방과 상담을 돕는 “생명의 전화” 상담교육을 의도적으로 받기도 하였다.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나와 너, 설교자와 청중의 구도로 구분하기보다 “우리”라는의 마음으로 같은 편이 되어주고 참여자, 지지자, 동반자의 자세를 가진다면 좀 더 가능해질 것이다.

성도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고통의 일상에서도 복음이 경험되는 자리요, 소망이 갱신되는 자리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복음이 설교라는 매개를 통해 전해질 때, 회중 저마다의 힘겨운 일상이 고려되지 않은 채 다소 성급히 복음의 논리가 완성되었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복음 그 자체는 완전하나, 복음이 선포되는 대상에게는 그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자리가 있다. 목회자가 이들의 시련과 아픔을 공감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설교를 전달할 때, 그 설교는 청중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설교자의 머리에서 나온 설교는 청중의 머리에만 닿지만, 설교자의 가슴에서 나온 설교는 청중의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2. 지역교회의 대사회적 측면

1)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교회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은 2021년 700만을 넘어 전체 가구의 33.4%에 육박한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족으로도 대변되는 MZ 세대의 개인주의는 더욱 심화되는 추세다. 김난도는 소득의 양극화는 정치, 사회 분야로 확산되어 갈등과 분열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우울증 환자는 증가하고, 자살률도 증가하였다. 한국의 경우 10대~30대 연령층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 것으로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인데, OECD 평균 11.5명(인구 10만 명당 자살 수)보다 2.1배나 높은 24.7명이라는 충격적인 수치이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매일 37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상황이다. 가족이나 이웃도 모르게 혼자서 앓다가 죽는 이른바 ‘고독사’도 지난 5년간 2,735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술 문명은 발달하고 경제는 성장했지만, 현대인이 느끼는 실존적 고독의 무게를 이 지표들은 반증한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며 하나님이 교회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충만으로 세우셨다는 사명을 되새긴다면 교회의 공공신학적 실천과제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곤경에 처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셨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눅 10:31-32).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수종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이었다면, 그러한 종교지도자가 출석하는 예배당에 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해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예배당 내부의 업무와 봉사에 헌신하는 것은 옳은 일이요,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만 착념한 나머지 예배당 바깥의 강도 만난 사람, 자살을 고민하는 청소년, 송파 세 모녀와 같이 생활고를 겪는 사람, 미혼모, 독거노인, 외국인 노동자, 탈북민들의 신음을 듣지 못하고, 아픔을 돌보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기대를 빗나간 헌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 목사회의 의장으로서 목사회 전체의 의견을 시의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제네바의 컨시토리움에 깊이 관여했는데, 제네바 정부가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를 향하여 가난한 시민을 위해 무료 진료를 해줄 것과 빵, 와인, 그리고 고기의 가격을 통제할 것과 노동시간 규제와 임금인상 그리고 실직자의 재교육에 관한 조례를 제정할 것을 빈번하게 요청하였다. 또한, 칼빈은 교회법으로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① 성직자들, ② 빈민들, ③ 교회 건물 수리, ④ 타지방과 본 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 몫을 마련했다.

지역교회의 목회자와 당회 장로들은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도 힘을 쏟아야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신 지역의 필요와 아픔과 현안에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어느 동네에서 자살 사건이나 묻지마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관할 경찰서나 구청에서만 관심을 쏟을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긴급 당회를 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역사회와 호흡하려는 교회의 공공신학적 실천 모습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학교, 지자체, 보건소 등 다양한 경로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돕는 방법도 물질적 지원이나 멘토링, 방문, 상담 서비스 등 다양할 것이다. 핵심은 교회가 자기 교회 중심성에서 벗어나 도움을 절박한 강도 만난 자를 지나치지 말고, 그들의 신실한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타인을 위해 신실한 함께함으로 이웃이 되려고 할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는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주장은 그런 면에서 타당하다.

2) 상식이 통하는 교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시며, 정의와 공의의 회복을 촉구하신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징계와 심판이 하나같이 지도자들을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윤갑이 제시한 이사야서에 나타난 다섯 가지 공공신학 항목을 보면 이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①약자에 대한 부자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질책, ②정치 고관들의 사회·경제적 횡포 금지, ③재판관들의 부당한 판결에 대한 질책, ④타락하고 게으른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질책, ⑤정치인들의 불신앙적 정치 외교에 대한 질책이다. 국가를 쇄신하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먼저 솔선해야 하고, 교회가 갱신되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자가 먼저 돌이켜야 한다. 에스겔서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시면서(33장~39), 그 시작 지점인 33장에서 회복 예언을 전할 도구로 부름 받은 에스겔에게 파수꾼으로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을 전할 책임을 주셨음을 거듭하여 주지시키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15:14).

공공신학의 주체인 교회는 세상을 향해 공공신학을 외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속한 교회공동체 내에 공공신학적으로 거침이 되는 부분이 없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소자에 대한 사랑과 약자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기 전에 교회 안에서 이러한 가치가 건실하게 구현되고 있는가?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사이에, 당회 장로와 부교역자 사이에 세상의 갑질 문화가 이식되어 있지는 않은가? 종교세 보고나 기부금 영수증 등 재정이 투명하게 기획, 집행, 결산, 보고되고 있는가?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가진 자가 은근히 대접받고 약자가 무시당하는 안타까운 일은 없는가? 세상에서 일어났다면 대서특필될 일이 교회 안에서 은혜와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는 경우는 없는가? 상식(common sense)이 통하는 교회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진화론이나 유신진화론에 대해 물어올 때, 청년들이 동성애나 페미니즘에 대한 설명을 요청할 때, 3040 젊은 부부가 정치적 이슈를 질문할 때, 목회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회자가 모든 질문에 시원한 답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더라도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덮어놓고 믿게 하기보다는 좀 더 공부해서 알려주겠다든지, 그에 적실한 특강이나 세미나를 제공하려는 유연한 자세는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다음 세대가 일상에서 겪는 고민과 질문들을 교회로 들고 왔을 때, 해답은 주지 못하더라도 질문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분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절실하다. ARCC가 발표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보면, “청년들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대화의 내용은 일방적이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며 “기성 세대가 워낙 신앙적으로 뜨거웠고 일구어낸 것이 많기 때문에 이해하지만 청년들이 볼 때 강압적이고, 소통이 안 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의심은 불신앙이 아니라 더 견고한 신앙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결과는 그러한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중세의 신학자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통해 우리 신앙의 대상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시기에 참된 신앙인이라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고, 성찰함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환경이 다르기에 질문들이 다를 수 있다. 교회는 그러한 의심과 질문을 불신앙으로 간주하기보다 공감과 경청,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중언어 구사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 복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교육하는 교회

한국교회의 공공신학적 실천과제로서 지역교회의 교육과 훈련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 교육은 교회에서 잘 봉사하는 충성된 일꾼을 세우는 데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공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헌금 생활과 봉사에 충실하면 소정의 교육과 절차를 거쳐 직분자로 세운다.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교육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 교육이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복음의 공공성에 동의한다면, 교회는 목회자에 충성하는 리더, 교회 일에만 열심인 직분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향을 끼치는 전인적 제자, 성숙한 시민으로 세우는데 교회 교육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와 세상, 주일과 주중을 구분 짓는 성속 이원론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된 온전한 성도를 길러내야 할 것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공신학이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강좌을 개설하거나 이를 주제로 오후예배, 수요예배 및 교사 교육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입장을 가져야 할지 그 분야의 전문가를 초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둘째, 성도들이 공공신학적 소양을 갖추도록 비신자에 대한 존중, 공감과 경청, 이중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칠 필요가 있다. 목회자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적지 않은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분리되는 반문화적 태도를 견지하려고 한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려면,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익혀야 함에도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 안에만 매몰된 형국이다. 결국, 복음은 비신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채 고립된 섬과 같이 교회 안에만 머물게 된다. 교회는 성도들이 자신이 믿는 복음의 본질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비신자들과 소통과 공감을 통해 그들의 눈높이로 전달할 수 있는 이중 언어능력을 배양하도록 힘써야 한다.

셋째, 공동체성의 훈련이다. 복음의 사사화는 복음의 공공성을 약화시켰다. 복음의 공공성을 성도들에게 실제적으로 가르친다고 할 때, 공동체성의 회복은 그것의 필연적 기초가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열의 아홉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거기에 이어폰까지 낀 모습은 초개인주의화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다. 스마트폰과 SNS의 과용으로 인하여 통계에 따르면, 5-14세 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 장애인 ADHD 환자가 2017년 3만 6,960명에서 2021년 5만 6,115명으로 5년 새 무려 51.8%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교사의 수업에 집중하기 힘들어할 뿐 아니라, 일대일로 눈을 맞추며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것에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영적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내면의 공허함으로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그들은 더욱 SNS를 통해 가상공간에서 친구를 찾고, 공감을 추구한다. 지역교회마다 위치와 규모도 다르고, 공동체의 분위기와 상황도 다르기에 일률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각 교회의 교회학교 아이들, 청년들이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정서적 교감을 나누도록 도와야 한다. 인간은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며, 서로가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성의 회복은 이들이 사사화된 신앙을 극복하고 복음의 공공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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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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