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필자가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한 것은 52년 전이다. 나는 암스텔담에서 제네바까지 갈만한 여비가 없어서 ‘취리히에서 열리는 선교대회에 참여한다’는 조건으로 따라갔었다. 취리히에서는 큰 전도대회가 열렸고 숙소에 여러 명이 함께 머물면서 각국에서 참가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칼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슬그머니 숙소를 빠져나와 제네바로 갔다.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그 옛날 요한 칼빈이 제네바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을 때, 파렐이 찾아와서 ‘제네바를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만들어 달라!’고 한 그 근방이었다.

당시도 제네바는 국제도시였다. 도시국가였지만 칼빈이란 청년이 <기독교 강요>를 쓰고, 셍 삐에레 교회의 설교자로 부임하면서 그는 전후 27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면서 제네바시를 개혁해 나갔다. 제네바 앞에는 아름다운 레만 호수가 펼쳐져 있고, 저 멀리에 보이는 몽블랑의 환상적인 자연경관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흠모하게 하였다. 1559년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웠을 때 유럽 전체에서 161명의 학생들이 등록하였다. 지금처럼 라디오도 TV도 없고, 핸드폰도, 신문도 없던 시대에 칼빈이 제네바에 이상적인 아카데미 곧 <대학>을 세운다는 소식이 소문에 소문을 타고 유럽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 후 10년 만에 무려 1,600여 명의 학생들이 등록했었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신학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 교육, 즉 인문, 사회과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성경적 세계관>을 가르치는 당대 최고의 학교였다.

그런데 이렇게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우기까지 칼빈은 무려 19년이라는 준비 기간을 가졌었다. 그는 당시의 교육자들에게 묻고 또 묻고 배우고 또 배우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드디어 1559년에 학교를 세우는 날,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학장으로 세우고, 칼빈은 그냥 기도 순서 하나를 맡았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이여! 이 학교가 경건과 학문이 있는 학교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목양지인 셍 삐에레 교회로 돌아왔다. 칼빈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모두가 잘 아는 데로 칼빈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무덤이나 비석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52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스위스 제네바는 국제기구의 본부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세계 적십자 본부, 세계교회협의회(W.C.C) 등등, 제네바는 중립국이면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다. 작지만 부강한 나라 스위스는 최근 정부에서 돈을 공짜로 나누어 준다고 했다. 그러나 스위스 국민들은 결사반대했다. 공짜를 좋아하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대중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제네바의 레만 호수를 나는 십여 차례 가봤다. 잊지 못할 일은 1986년 6월 헝가리의 데브레첸서 열린 ‘제4차 세계 칼빈학회(4th International Calvin Congress)’에 참석하려고 가던 길에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에 앉아서 한철하 박사와 밤이 깊도록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한국에서 <칼빈학회>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이종성 박사, 한철하 박사와 필자는 비행기로 난생 처음 당시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방문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우리 셋은 붙잡혀서 1시간 이상을 지체했다가 풀려났고, 회의 장소인 데브레첸(Debrechen)까지 여행을 했고, 전 세계 100여 명의 학자들이 모인 곳에서 필자는 설교를 맡아 봉사하기도 했다.

금번에 필자는 다시 제네바를 방문했다. 필자의 책 <아브라함과 카이퍼의 사상과 삶>이 독일어와 불어로 번역되어 출판기념회를 겸해서 독일과 프랑스와 스위스를 방문하는 중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독일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현장을 다시 한번 방문했고, 칼빈의 조국 프랑스도 방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한 것은 루터의 나라에 루터의 외침이 없었고, 칼빈의 조국 프랑스에는 칼빈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파리에서 <칼빈과 칼빈주의 특강>을 한 후 다시 제네바로 왔다. 이번에 내 관심은 1933년 2월 제네바 레만 호숫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도너가 유숙했던 호텔과 카페였다. 그 당시 국제연맹 총회가 열리는 국제도시 제네바에는 전 세계 60여 국의 VIP와 대표단, 옵저버들과 보도진 등, 관광객들이 모여 호텔이 동이 났고, 제네바는 초만원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몽블랑 다리 앞에 있는 호텔 드루씨(Hotel de Ryssie)에 2개월 동안 머물면서 독립을 위해 눈물겨운 외교전을 펴며 <일본추방>을 위해 회의, 방송, 신문 인터뷰를 했다. 21일 아침 식당 자리가 모자라 외톨이가 된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중소기업의 딸 <프란체스카 도너> 테이블에 합석해서 처음 만나게 된다. 프란체스카 도너와의 만남은 이승만에게 날개를 단 셈이 되었다. 영어와 불어, 그리고 타이피스의 전문가인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박사를 만나 사랑이 싹텄고 그 후에 뉴욕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그 역사적 만남은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초석이 되었으니, 레만 호숫가에서의 둘의 만남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섭리였다. 독립운동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가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을 세우고 한·미 동맹,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기독 입국을 하는 동력이었다. 나는 36년 전에 이화장에서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를 모시고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있다.

레만 호숫가의 몽블랑에서 나는 이승만 박사와 프란체스카 도너가 머물렀던 호텔 바로 옆 까페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러브스토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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