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과연 전도를 위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가?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이 가르침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례하게 전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이라고 이해한다. 조용히 눈 감고 쉬면서 전철을 타고 가는 곳이든, 모두가 발가벗고 있는 민망한 목욕탕이든, 하다못해 가족들이 안락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정에 초인종을 누르고 거짓말로 문 열리게 하고 전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이라고 이해한다. 과연 바울은 이 성경구절을 통해 무례함과 비상식적인 전도를 독려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분명히 아니다.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피전도자가 구원의 때가 됐든지 아니 됐든지 우리는 알 수 없으므로 힘써 복음을 전파하라는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옳기 때문에 무례함과 부도덕함이 정당화된다고 가르친 부분이 없다. 성경적인 전도 방식이라면 박해가 있을지언정 부작용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전도는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 전도하면서 전도의 문을 막는다. 더 나아가 교회가 세상을 박해할 정당한 명분을 제공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런 전도행위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의 욕심이 앞서는 철학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마키아벨리즘’이라 한다. 목적이 옳다면 수단과 방법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논리는 신천지 같은 사이비 이단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이슬람에서도 이런 전도 방식이 그대로 나타난다. 그들은 성경의 사람들(기독교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어떤 거짓말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그들은 ‘타끼야’ 교리라고 한다. 우리는 이단이나 무슬림들이 이런 식으로 전도하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모습이 오늘날 크게 성장했다는 정통교회들의 모습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만일 이단의 이런 전도에 분노하면서 우리의 전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로남불이다. 성경적인 신앙의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도리어 참된 기독교라면 전도를 하는 것에서부터 이방종교나 사이비와 구별돼야 마땅하다.
그러면 성경은 과연 전도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보자. 이번 칼럼에서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복음 전도의 장소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장소에서나 광신자처럼 전도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간혹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광장이나 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이 성경의 전도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전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전도는 사도행전의 모습이 아니다. 도리어 이런 식의 전도는 복음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만 망치게 된다. 물론 이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고 예수 믿게 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열매는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성경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놀랍게도 성경에 기록된 전도는 우리가 아는 것과 너무 다르다. 성경을 꼼꼼히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셨다. 그래서 성전이나 회당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주된 장소였다. 뿐만 아니다. 바울은 아덴(아테네)에 갔을 때,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회당을 찾아갔고, 헬라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장터’를 찾아갔다.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행 17:17)
여기서 바울이 헬라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장터를 찾아갔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시 장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냥 물건을 사고파는 정신없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장터’를 ‘아고라’라고 한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주로 정치나 사회, 경제, 철학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하면서 토론하던 장소였다. 바울은 이곳이야말로 사람들이 복음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루디아 전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바울은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회당이 없었으므로 기도처에 갔다. 그곳에서 바울은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가운데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복음을 받게 된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의 전도는 이런 성경적 전도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을 치료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행 3:10)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이 중요하다. 우리는 대부분 이 기적이 일어난 어수선한 장소에서 전도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그 기적이 일어난 장소에서 “솔로몬 행각”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복음을 전했다. “솔로몬 행각”은 유대 랍비들이 강론하는 공적인 장소였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복음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했다. 이런 장소가 아니었다면 베드로는 복음을 깊이 있게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 논증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공적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나, 개인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부분은 다음 칼럼에서 명확하게 다뤄질 것이다. (계속)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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