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과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전철 안, 빌런으로 취급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반말과 막말을 섞기도 하고, 때로는 승객들과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이런 사회적 피로도는 점차 누적되어 지난 4월 5일 모 신문에는 전철 기관사가 “전도하는 분 내려요. 안 내리시면 출발 안 합니다”라는 제하의 기사까지 실린 상태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에서 전도는 심각한 공해로 취급돼 가고 있다. 그 결과 열차 내 전도 행위는 15~45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는 불법으로 간주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 상태가 계속될 경우 전도는 과태료 부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를 반사회적 모임으로 몰아갈 명분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우려는 지나친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기독교는 점차 그렇게 취급되며 박해에 직면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교회에서 전도는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의로운(?) 행위로 여겨진다. 이젠 사회적으로 이런 지탄을 받는 전도에 대해 성경적으로 냉철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이런 전도 풍토가 교회 성장이라는 종교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정당화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회마다 개혁의 메스를 대야 할 때다.
이렇게 전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낼 때면, 항상 반감 어린 사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들의 논리는 이런 식으로 전도하더라도 준비된 영혼은 기적적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대해 반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이런 전도로 인해 구원받은 영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실족하는 영혼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전도 행위를 통해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나의 전도 행위가 옳음을 입증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은 우리의 전도가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주권에 의해 구원하신 것뿐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유다가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이루신 선이 가룟 유다의 행위를 정당화할 명분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잘못했고,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신 것뿐이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우리의 무례하고 비 성경적인 전도 행위를 통해 누군가 구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족하는 사람은 더 많기 때문이다. 전철 안에 구원받게 되는 소수의 영혼 못지않게, 실족하는 다수의 영혼을 향해서도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전도를 통해 구원받는 것만 강조하지 않는다. 이와 아울러 성경은 우리로 인해 어린 소자 한 명도 실족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균형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어린 소자 한 명을 실족시킨다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더 낫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신다(마 18: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하여, 자신의 행위로 인해 실족하는 영혼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고기 먹을 자유를 영원히 포기하겠다는 책임 있는 고백까지 했다(고전 8:13).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은 전도 받아 구원받는 영혼들에만 적용할 문제가 아니다. 전철과 거리에서 눈살을 찌푸리므로 실족하는 다수의 영혼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균형이다.
아울러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도에서 반성해야 할 또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복음 외의 세상적 미끼로 교회에 등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부터 ‘라이스 크리스천’을 양산하는 행위라고 지탄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교회는 양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 6.25 전쟁 직후 쌀 받기 위해 교회 나오게 된 사람) 양산을 멈추지 않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오로지 복음 때문이어야 한다. 복음 이외의 것으로 교회 안에 유입된 상당수 사람은 교회를 세속화 시키는 주범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일차적 존재 방식은 전도보다 거룩이다. 거룩을 훼손하면서 교회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건강에 해치는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다급한 교회 성장을 해결하기 위해 라이스 크리스천을 계속 유입함으로 결국 교회는 점차 세속화에 전복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면 어떤 분은 일단 이런 식으로라도 교회에 등록시키면 언젠가는 믿음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불신자와 결혼해서 예수 믿게 전도하겠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이 논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 의도를 잘 안다. 전도를 위해 결혼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지만 그 상대와 결혼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논리는 결국 전철이나 거리에서 다수의 영혼들을 실족시키더라도 한두 영혼을 예수 믿게 함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라이스 크리스천 양산 논리는 전철과 거리 전도가 낳은 문제에 대한 동일한 논리로 반박이 된다. 복음에 관심 없이 교회에 유입된 라이스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극적으로 중생하게 된 소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 믿게 된 것은 우리가 옳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잘못했지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뿐이다. 그에 반하여 우리의 잘못된 전도는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게 된다. 이렇게 유입된 회심하지 않는 다수 사람들은 교회의 거룩에 치명상을 입히는 트로이 목마가 된다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이단 교주가 나오고, 자유주의 신학자가 나오고, 삯꾼 목자가 나온다. 교회를 큰 혼란에 빠뜨리는 장로들이 나오고, 사회에 지탄받는 기형적인 기독교인들이 나온다. 이들이야말로 트로이 목마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하여 교회는 점차 거룩을 상실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기능을 상실한다. 세상과 구별됨 없는 이혼율과 자살률을 산출해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가 교회 안에서 같은 비율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은 이런 식으로 무참히 무너진다.
어쩌면 사탄은 이런 전도 방식을 통해 작은 것 하나를 주고 전체를 다 먹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에 즐거워하지만, 사실은 큰 것을 잃고 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은 전도에도 적용된다.
이쯤 되면 ‘그럼 당신은 성경적인 대안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분명히 있다. 대안이 아니라 정답이 있다. 성경은 분명히 이런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준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을 품으면 얼마든지 개혁할 수 있는 명쾌한 성경적 대답이 있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전도의 원리가 성경에 있다. 다음 칼럼에는 성경적인 전도 원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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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