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위로 성장하라고 외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큰 사람, 더 높은 사람이 되려고 분투한다. 하지만 인생의 가치는 위로 성장하는 데 달려 있지 않고, 아래로 성장하는 데 달려 있다. 아래로 성장하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다.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다.
저자 닉 톰슨 목사(테네시주 코너스톤 장로교회)는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집필했으며 ‘아래로 성장하라’고 외친다.
저자는 책 속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할머니한테 설명할 수 없다면 어떤 것을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지적인 성향이 강하다. 나는 신학책을 읽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거창한 생각이나 말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가 되어 누리는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는 내게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내가 가정 예배를 드릴 때 헬라어 ‘페리코레시스’의 어원학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 관한 20분간의 강론을 시작하려고 하면 다섯 된 우리 아이는 즉시 무관심한 기색을 드러낸다. 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나의 자녀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겸손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 미덕이 복잡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겸손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가 그 개념의 복잡성보다는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더 관련이 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겸손의 행위의 관점에서 종종 설명된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을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겸손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정의했다. 겸손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고 했다.
이어 “겸손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자기 인식에서 비롯한 낮아지려는 성향’으로 정의될 수 있다. ‘겸손함’을 뜻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종종 ‘낮은’으로 번역된다. 이 말은 땅바닥에 엎드려 절한다는 개념을 전달한다. 성경은 ‘겸손한 자’와 ‘교만한 자’를 날카롭게 대조한다. 겸손의 낮아짐이 외적인 물리적 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은 교만의 높아짐이 외적인 속성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겸손은 영혼의 성향을 가리킨다. 이것이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 일커으신 이유다. 겸손의 본질은 ‘영혼의 낮아짐’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님은 잠언 4장 23절과 같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의 행위와 말이 모두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가르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겸손은 낮아진 마음을 가리킨다. 겸손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춰볼 때 생겨난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지향하는 자기 인식’으로 일컫는 것이다. 윌리엄 팔리는 겸손을 ‘하나님의 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능력’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겸손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지만, 사실 상 그 본질을 간과하고 있다. 겸손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아가 하나님께 매료됨으로써 야기되는 낮아지려는 성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인해 형성된 영혼의 내적 상태를 의미힌다. 그것은 보는 능력이 아닌 봄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잠언 15장 3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솔로몬은 병행어법을 이용해 이 두 미덕을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그는 또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이니라’(잠 22:4)라고 말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겸손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은시다. 그러나 낮아지려는 겸손한 성향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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