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학도로서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피하고자 했던 작가는 어쩌다가 십자가 연작(100점)을 그리게 되었을까. 자칫 종교화 작가로 규정되기 쉽고, 지난 2천 년간 소재로 사용되어 온 십자가는 웬만큼 잘하지 않는 한 고루한 작품이 되기 쉬우며, 십자가를 그리더라도 모독과 찬양 일변도의 양극으로 흐르는 게 일반인 현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작가는 1년 동안 100개의 십자가를 그리기로 한다.
20년 이상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이자 뿌리 깊은 기독교 신앙 유산 속에 자란 저자 이성수 작가는 두 개의 막대기로 구성된 십자가의 구도 가운데 담긴 신의 사랑과 구원의 의미를 기존의 익숙한 방식이 아닌 작가이자 화가의 고유한 시선으로 재해석하고 이해해 보려 한다. 작가로서, 신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정직하게 맞서 보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은 자신의 신앙을 이해하려는 한 신앙인의 묵상의 기록이자, 예술가로서 십자가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그려 낸 시도이다. 한 젊은 예술가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며, 예술과 신앙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 어떻게 공존하며 승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아름다운 사례이자 정점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 속에서 “십자가의 역설은 내게 어떤 신선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강요된 진실이나 의문 없는 규정을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예술가의 기질상 나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를 웬만해선 믿지 않는다. ‘진실은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대립된 두 가지의 가치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역설과 모순을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이 평소 내가 찾던 진실의 형태임을 알고 주목하여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예술가로서 십자가를 묵상한다. 예술가는 신학자나 역사가와 달라서 무엇이든 추상적 가치인 미(美)로 환산해서 본다. 그리고 미학적으로 본 십자가는 내가 아는 어떤 다른 상징보다 단순하고 강렬하며 모순되어 진실하다”고 했다.
이어 “신은 인간을 ‘시간의 트랙’에 올려 역사를 시작한다. 신은 이 시점에서 시간 바깥에 있으므로 모든 역사를 알고 있다. 시간의 트랙에 오른 인간은 자유 의지에 따라 시간을 살아가며 매 순간 선택을 한다. 신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며 인간이 내린 매 순간의 선택을 반영하여 역사를 만드는 동시에 역사를 완성한다. 이렇게 시간 안에 있는 인간과 시간 밖에서 인간의 선택을 반영하여 역사를 창조하는 신의 협업으로 마침내 역사는 만들어진다. 신은 모든 시간과 인간의 모든 선택을 동시에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선택의 결과도 신의 계획에 포함할 수 있다. 따라서 신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창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은 인간에게 창조성을 주었지 예술을 준 것이 아니다. 예술은 인간의 욕구에 의해 발생한 (신이 주신 창조성을 이용한) 창작의 결과물이자, 그 아름다움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결과 시대의 목소리가 되어 신 앞에 울려 퍼지게 된 강렬한 실존의 메가폰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면 예술은 그 자체가 기도나 찬양만큼이나 존중되어야 할 신과 인간 사이의 소중한 기록이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미술 학도로서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먼저 종교화 작가로 규정되는 순간 순수 미술 작가로서 인정받기 어렵고 기능적 프로파간다 작가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십자가라는 주제가 너무 현저하고 벌써 2천 년간 소재로 사용되어 이젠 고루한 취급을 받는다. 반면 또 대가들에 의해 나온 시대적 명작들이 이미 너무 많아서 웬만큼 잘 해석해서 뛰어난 솜씨로 그리지 않는 한 그나마 종교 작가로 인정받기도 힘들기 때문이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