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 제1묘역 왼쪽 제6묘역 입구에 육탄 10용사비가 있다. 1949년 5월 불법으로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포탄을 안고 적의 진지에 뛰어든 서부덕 중위(당시 상사) 등 10용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제1묘역에도 6.25 때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분들이 잠들어 있고 제2, 제3묘역에는 베트남 참전을 통하여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 분들이 잠들어 있다. 조국이 부를 때 응답한 사람들, 목숨을 필요로 할 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준 사람들, 조국이 호국의 피를 요구할 때 기꺼이 그렇게 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서편 묘벽이 시작되는 제1묘역에는 문경전투 표지판이 서 있다. 국군 6사단(사단장 김종오)은 1950년 7월 12일부터 7월 31일까지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이화령을 통과하는 국도 3호선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군은 이화령-조령전투와 영덕지구 전투를 통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킴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주었다.
6.25전쟁 초기에 서부전선에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있었다면 동부전선에는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이 있었다. 6사단은 춘천-홍천전투, 동락리 전투, 문경전투, 영천-신녕전투를 통하여 적의 남하를 지연 또는 저지하고 반격전에서 압록강 초산에 가장 먼저 도달하였고, 용문산 전투 등에서 전세를 뒤집는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6사단은 문경전투 직전 음성의 동락리 전투에서 한 여교사의 기지와 용기로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는 승리를 가져왔다.
제1묘역에는 문경전투에서 전사한 39명의 병사들이 안장되어 있다. 당시 대대장이던 김용배 대령은 1951년 7월 양구전투에서, 박노규 대령은 1951년 3월 영양 일월산 전투에서 전사하여 장군 제1묘역에 나란히 묻혀있다.
1950년 6월 25일 당일 동두천과 포천이 함락되고, 27일 창동과 미아리 방어선이 돌파되고, 28일 새벽 서울 중심부가 점령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 명령을 하달하였다. 1949년 6월 말 미군은 군사고문단만 남겨두고 모든 병력이 철수하였고, 국군 6만 5천 명에 경비병 수준의 무장과 소수의 해군함정을 지원했다. 그에 비해서 북한군은 소련의 지원으로 공격 위주의 탱크를 비롯한 현대적 장비와 군사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국군 수뇌부는 적의 한강도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를 편성하여 강남, 흑석, 노량진, 영등포, 김포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강철교 주변의 흑석동, 노량진, 여의도는 하루에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6일간의 지연전으로 미 지상군이 진입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노들나루 공원에 한강전투 전사자 941명의 이름이 전사자명비에 새겨져 있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 육군 2개 사단이 차례로 투입되었지만, 오산과 대전전투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지 못했다. 적은 호남과 경북 북부, 동해안 등 세 방향으로 남하하여 왜관~포항, 마산선까지 장악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마산, 왜관을 연결하는 총 240km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마산에서 왜관까지 120km는 미군이, 왜관에서 영덕까지 120km는 국군이 맡았다. 북한군이 14만 명을 동원하여 8월 15일 부산을 외치며 총공격에 나섰지만. 미 공군의 효과적인 폭격과 아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낙동강 교두보를 사수할 수 있었다. 국군1사단이 주축이 된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결정적 발판이 되었다.
전쟁의 양상은 유엔군의 인천상륙, 수도탈환, 북진, 평양 입성, 압록강 도달, 중공군 개입, 1.4후퇴와 재반격, 휴전협상과 고지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아군은 북진을 계속해서 평양을 점령했다. 그해 10월 24일 추수감사절 공세가 개시되어 미 8군은 압록강으로, 미 10군단은 청진으로 진격하였다. 또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 변의 초산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이미 10월 19일부터 중공군 4개 군단 26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병력은 17개 군단 1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또한 11월 1일 미그-15기로 무장한 소련공군이 중공전투기로 위장하여 참전하였다. 중공군은 서부 운산으로 5개 군단이, 동부 장진호로 3개 군단이 투입되었다. 아군은 크리스마스 공세를 통해 조기에 차단하려고 했지만, 평양을 내주고 3.8선으로 밀려났다.
한편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서 한반도의 지붕 장진호까지 북상했던 미 해병1사단은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 12만 명에게 겹겹이 포위당했다. 미해병 1사단은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속에서 15일간의 사투로 10만 5천 명의 아군과 피난민 9만 8천 명, 차량 1만 7,500대와 장비 30만 톤을 193대 선박으로 철수 작전에 성공했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3차 공세를 저지하지 못한 아군은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고 평택, 원주, 영월, 삼척에 이르는 37도 선으로 물러났다.
전세를 바꾼 것은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였다. 당시 국군 6사단의 용문산 전투는 적의 춘계 대공세를 물리치고 공세를 전환하여 문산, 금화, 고성전에서 대치하였다. 피의 능선, 펀치볼, 단장의 능선, 후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 철의 삼각지, 베티고지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 뼘의 땅을 되찾기 위해서 국군과 세계 15개국의 젊은이가 수없이 목숨을 바쳤다. 마지막 결전은 1953년 7월 13일부터 19일까지의 금성전투였다. <계속>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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