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전도입국론의 전개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월남한 한경직은 영락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에 전념했다. 교회 초창기에 영락교회 청년들 가운데 몇몇이 한경직 목사가 행한 설교를 녹취하여 「건국과 기독교」라는 제목의 설교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설교집에는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행했던 설교 가운데 27편이 따로 추려져 실려있다. 이는 영락교회 강단에서 선포된 한경직의 모든 설교를 총망라한 것이 아니라 해방정국 시기에 ‘건국’이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발화된 것들을 의도적으로 발췌, 편집하여 1949년에 출간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경직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역동적인 시대에 건국의 방향과 방법을 묻는 대중들, 특히 기독교인들을 위해 설교를 통해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A. 민주주의·공화주의 이해
한경직은 우리 겨레가 “기독교 이상에 의하여 건국을 할 의무가 있다”며 자신이 미국 유학시 경험한 기독교적 민주주의야말로 장차 한반도에 정착시켜야 할 최적의 제도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채 해방을 맞은 조국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 뿌리내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한경직은 교회만이 이 과업을 가능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도가 곧 최대의 정치운동”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로교회는 당회라는 대의민주제의 정체(政體)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경험한다면 자연히 민주주의 제도를 체득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나아가 활약하면서 민주주의 제도가 온 나라로 확산되며 자연스레 뿌리내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이처럼 한경직이 제시하는 민주화의 방법은 교회론과 선교론으로 전환되어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공화주의의 경우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시작된 것으로 서구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크나 미국과 달리 무신론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우리나라 실정에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당시 해방공간에서 좌익들이 주도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일을 두고 한경직은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 표방하는 시대”라며 공화주의마저 배제하게 된다. 이와같이 한경직이 공화제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 이유는 첫 번째로 무신론적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인 연유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인민공화국을 거부하는 실존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B. 사회주의·공산주의 이해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구별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경직은 사회주의의 경우 무신론적 유물론과 폭력적인 수단만 제외한다면 기독교 사회주의로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으로만 기능할 뿐, 해방정국 당대에 공산주의와의 친밀성을 우려하여 한경직은 기독교 사회주의마저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나아가 공산주의만큼은 거칠게 비판하고 있다. 그 중에서 주목할 것은 공산주의를 “묵시록에 나오는 붉은 용”이라고 지목함으로서 적그리스도화하여 신학적 실체로 명명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한경직만의 고유한 언명이 아니라 당대 서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던 수사였다. 따라서 한경직은 설교를 통해 해방 직후 표출되던 서북 지역의 신학적 정서를 대변한 것이었다. 물론 해방정국 당대의 건국방식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자택일의 대결구도로 전개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한경직의 이러한 언명이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바른 판단이었는지는 오늘날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C. 기독교적 민주주의와 전도입국론
한경직은 교회를 보호하고 진작시킬 수 있는 체제는 민주주의만이 유일하다고 판단하여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에 공산주의를 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용으로 지목하여 체제로서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배제한다. 이에 한경직은 전도를 통해 건국운동을 일으키자며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 교회가 많아져야만 나라 역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국가로 확립될 수 있다는 내용의 전도입국론(傳道立國論)을 주창하게 된다. 이는 건국론을 교회론과 선교론으로 전환한 것으로서, 전도를 통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를 많이 세우게 되면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 교회를 통해 민주주의 정신이 백성들 사이에 빠르게 스며들게 될 것이고 나아가 교회에서 훈련받은 성도들이 사회 각 방면으로 진출하여 민주국가를 건설하게 될 것으로 낙관한 것이다. 김구와 같은 민족지도자 역시 “경찰서 열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낫다”는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을 추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전도입국론의 방법론은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기여하자는 서북 지역 실력양성론에서 영향 받은 선적이고 점진적인 개혁론과 더불어 숭실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학습한 전도 훈련과 가시적 교회론의 영향이 엿보인다. 나아가 이 전도입국론은 1948년 8월 민주주의를 정체(政體)로 한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승계되어 한국교회의 폭발적 부흥에 신학적 기틀을 제공하게 된다.
V. 전도입국론의 명암
기독교가 근간이 된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던 한경직의 바람대로 1948년 8월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며 초대 대통령으로 기독교인 지도자였던 이승만이 선출된다. 역사는 한경직이 제시한 청사진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으나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수립된 제1공화국이 1960년에 3·15 부정선거를 야기했고 이어서 일어난 4·19 혁명으로 막을 내리며 대한민국의 첫 정부가 기독교적 가치관을 담지한 것이 아니요 민주주의를 지향한 것도 아니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접하며 한경직의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론과 전도입국론이라는 방법은 신학적으로 과연 타당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재고해야 할 것이다.
A. 해방정국기 기독교 건국론의 스펙트럼
우선 한경직과 동시대에 활동하던 여타 기독교 지도자들은 어떠한 건국론을 가지고 있었는지 고찰함으로써 한경직이 신학적으로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다.
1. 김재준의 하나님나라 신학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한경직과 동문수학한 사이이자 조국의 교회를 위해 동역하자고 다짐한 맹우(盟友)였던 김재준(1901-1986)은 해방 당시 조선신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김재준이 지향하던 건국의 방향성은 선린형제단28) 강연록인 “기독교적 건국 이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글에서 김재준은 “기독교인의 최고 사상은 하나님나라가 인간 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이라며 하나님나라를 모든 국가가 따라야 할 궁극의 원형이자 모범으로 제시하여 민주주의는 물론 공산주의 역시 상대화시킨다. 또한 김재준은 사회주의를 하나의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받아들여 건국과 시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통전적이고 포괄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아등(我等)은 당면한 문제로 소위 공산주의 운동을 몹시 우려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과학으로 경제기구의 실상을 검토하며 그 더 좋은 재건을 기도하는 점에 있어서 존경할 것이며 그것이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 것인 한 우리는 그것을 수락할 의무가 있다.
이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김재준은 건국의 궁극적 원형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전제한다는 점과 공산주의를 사회과학적으로 적극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두 가지 지점에서 한경직과 두드러진 차이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한경직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삼고 전도를 그 수단으로 삼았다. 곧 교회라는 토대 위에 선 목회자라는 현실조건 아래에서 선교를 통하여 아래에서부터 국가를 구조해 올리는 상향식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김재준은 신학자답게 하나님나라가 이미 궁극의 이상으로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논증한 뒤, 교회는 그것을 이 땅에 구현해나가는 도구가 되어 위로부터 확산시켜 나가는 하향식 접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김창준의 사회주의적 기독교
한편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감리교신학교 교수 출신이던 김창준(1890-1959)은 백성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물적, 경제적 토대를 먼저 구축하는 것이 예수를 바르게 따르는 길이라고 여겨 사회주의적 기독교를 주장했다. 김창준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1947년 2월 좌익 단체들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면서 쓴 기록에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첫째로 나는 기독교 목사로서 특권계급의 편에 서는 것보다 예수의 정신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운 친구가 되고자 근로인민을 기초로 한 민전에 참가한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애(十字架愛)는 경제적 공평의 제도까지 병행해야 하며, 지금 세계의 무산대중은 기아선상에서 굶어 죽어가므로 형제애를 달성키 위하여 경제적 공평을 주장하는 민전에 참가한 것이다. 셋째로 국제정세에 순응하고 민족주의적 국가로서의 독립을 쟁취하는 첩경은 막부(幕府) 3상결정을 지지하는데 있으며, 우리 민족의 근본적 해방은 근로대중의 승리로 올 것이며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은 세계 인민민주주의의 최후의 승리로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3상결정을 지지하는 민전에 참가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교회가 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희구하던 남한사회에서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김창준은 결국 월북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해방정국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품었던 건국신학의 진폭은 의외로 넓었다. 그 신학적 스펙트럼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세 명의 인물인 한경직, 김재준, 김창준의 건국론은 민주주의적 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언뜻 대동소이한 것 같았으나 그 방법론에서 차이가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세 사람이 각각 추구하는 신학의 출발점은 서로 상이한데, 한경직의 경우 교회로부터, 김재준은 하나님나라로부터, 김창준은 민중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경직과 김재준은 기독교가 근간이 된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건국론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김재준이 하나님나라를 모든 국가가 지향할 궁극의 이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 자체를 목표로 삼은 한경직에 비해 보다 신학적으로 선명하게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김재준은 사회주의의 과학적 방법론은 물론 낮고 약한 자에 관심하는 그 정신을 적극 수용하면서 한경직에 비해 보다 포용적이고 통전적인 건국론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김창준의 경우 농민이나 노동자들과 같은 무산계급을 향한 관심과 그들이 안심하며 살아갈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회주의적 방법론을 신학 안으로 수용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를 표방한 건국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여타 기독교 지도자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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