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회갱신협의회 여성돌봄위원회가 1일 서울시 용산구 소재 후암교회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양현표 총신대 교수(실천신학)가 ‘초기 한국교회 여성의 위치와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양 교수는 강의 서두에서 구한말 릴리아스 언더우드 선교사의 “조선 여성들은 대체로 아름답지가 않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수줍음 때문에 그들의 눈빛은 흐릿해졌고 얼굴을 까칠까칠해졌으며 상처투성이가 됐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그러면서 “19세기 말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정신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총체적 난국이었다”며 “왕권 부패, 탐관오리,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조선에서의 패권을 놓고 청나라·일본·러시아가 대립했다”고 했다.
양 교수에 따르면, 당시 조선 여성에게 결혼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일부다처제도는 합법적 인신매매의 창구로 작용했다. 여성 대부분이 16-17세에 결혼했고, 조혼제도(12-15세)가 성행했다.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다. 여성들은 외출시 장옷을 착용해야 하기에, 기록에 따르면 ‘눈만 드러낸 채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길에는 천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었고, 이름이 없었던 여성들이 부지기수였다. 양 교수는 “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름이 여성에겐 없으니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의 문맹률 90.5%에 이르렀다. 교육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양 교수는 “인권이 존중되지 않았던 여성의 가정생활이었다. 사회생활, 교육, 종교 등 사회 각종 영역에서 조선 여성은 차별받았다”며 “조선 여성의 삶은 종속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비인간적이었다. 이러한 때 기독교가 조선 땅에 상륙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여성들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구한말 선교사들은 여성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봤다. 여성을 선교와 문명화 대상으로 생각했다”며 “여성들이 안방에서 벗어나 세상을 대면하게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결과 여성들이 교회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했고, 시대적·민족적 사명을 감당했으며, 구한말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했다.
양현표 교수는 “선교사들은 안방 남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조선 여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이들을 선교사로 양성하는 데 노력했다”며 “1884년부터 1945년까지 여성 선교사는 1,529명에 이르렀다. 여성을 위한 각종 교육기관이 설립됐다. 여성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조선 여성들의 문맹과 무지는 지속됐을 것”이라고 했다.
또 “선교사들은 개똥녀 등 아명으로 불렸던 여성들에게 세례명과 이름을 지어줬다. 가령 마리아, 에스더 등 성경 속 인물명의 이름이었다”며 “선교사들은 이름짓기와 세례 교육 과정에서 여성들에게 자연스레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름을 갖게 된 여성은 정체성을 얻었다”고 했다.
양 교수는 “선교사들은 여성을 위한 복음 교육에서 한문보다 한글을 택했다. 한글과 여성은 같은 운명이었다. 한글과 기독교가 상생하며 한반도에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소개하고 퍼뜨려 나갔다”고 했다.
양 교수에 따르면, 감신대 은퇴교수 이덕주 박사는 “여성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글을 깨우친 후에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 문서들을 읽고 선교사들과 공부하면서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를 발견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또한 “한국교회는 여학교를 설립하며 여성들에게 복음과 고등교육을 전했다”며 “여성 교육은 당시 조선 여성에게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는 기회를 제공했고, 유교적 관습과 가부장적 규범에서 벗어나서 근대적 생활방식을 형성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신여성이라는 새로운 여성상을 창출했다. 이는 조선 땅의 새로운 사회 계층을 출현하게 했다”며 “기독교는 구한말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복음은 조선 여성의 운명을 바꿨다. 그 결과 신여성이 출현했다”고 했다.
그는 “신여성들은 주로 전도 부인이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활동했다”며 “전도부인은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말씀을 설명하는 성경 선생이었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문헌을 판매하는 매서인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 소식을 조성 땅 곳곳에 전달하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들은 세상문물을 산간벽지까지 소개하는 문화매개체였다”고 했다.
그러나 “전도부인이 1932년경 여전도사라는 직분으로 발전해 노회가 관리했고, 이때부터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즉 여성은 수동적이고 제한된 역할로 변화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그러면서 “초창기 전도부인은 미혼여성, 과부, 축첩으로 인해 버림받은 여성, 나이든 여성 등이 대부분이었나, 한국교회 부흥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며 “가령 성경교사, 순회노방전도, 교회개척, 순회 주일 설교, 사경회 인도 등 교회 사역과 더불어 문맹퇴치 운동, 농촌계몽, 금주운동, 금연운동, 국채보상 운동 등 사회 운동까지 다양한 역할을 감당 했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여성사역자의 뿌리를 이곳에서 찾아야 한다”며 “구한말 여성은 조선교회 부흥운동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했다. 양 교수는 총신대 명예교수 박용규 박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은 대부흥의 시발점을 제공했고 직접 부흥을 경험했으며 그러면서도 대부흥의 결실을 가장 많이 향유한 당사자들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여인들은 대부흥의 주역이었고 그 대부흥의 최대 수혜자였다”고 했다.
양현표 교수는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여성들은 통회 자복했다. 부흥운동에서 여성의 한이 표출되고 치유와 인권 회복이 이뤄졌다. 같은 공간에서 남녀가 존재했고, 특히 남성과 여성은 동일한 성령체험을 했다. 안방에 갇힌 여성을 세상으로 불러냈다”고 했다.
특히 “당시 다른 아시아 국가와 달리 기독교는 조선의 암울한 역사를 바꿀 종교로 인식됐다. 여성 인권 향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기 조선 교회 안 여성들은 독립 운동을 위해 각종 비밀결사단체와 사회적 단체를 결성했다. 130개가 넘는 여성 단체를 만들어 불우이웃 돕기, 폐습과 퇴폐 문화 척결, 술 담배 아편 금지 운동, 절제 운동, 농촌계몽 운동, 보건교육 등 사회 계몽 운동을 펼쳤다”고 했다.
양 교수는 제언을 하며 “한국기독교는 초기 전도부인 등 여성의 사역으로 인해 부흥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한국교회는 여성의 사역과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초기 기독 여성들은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을 감당했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교회도 하나님이 여성에게만 허락하신 강점을 특화하는 사역이 분명히 있음을 알고, 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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