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28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최 교수는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어떻게 실행돼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설교자에게뿐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교회에서 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연설 형식의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중요한 것은 대형 교회에서는 연설식 설교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소수의 성도가 예배하는 상황에서도 연설식 설교만을 지향하는 설교자나 목회자가 많다. 이는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문화에서 연유한 측면도 있다”며 “설교는 원래 일방적 연설식 설교 방식이 아니라 대화가 있는 설교, 호밀리아(homilia)였다. 따라서 설교와 관련된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여러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첫째, 설교를 지칭하는 최초의 용어는 호밀리아이다. 이 단어는 ‘서로서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을 가진 호밀리엔(homilein)에서 파생된 명사로 2세기경 폴리캅(Polycarp)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에서 처음 발견된다”며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회중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지칭하는 전문어’로 형식적으로는 성경 본문을 순서대로 강론하는 강론식 설교(homily)에 해당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주로 교훈의 말씀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 이단의 발현으로 인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둘째, 설교와 관련된 또 하나의 용어는 프래디카치오(praedicatio)이다. 이 용어는 4세기에 이르러 라틴어가 예배의 공식 언어로 확정되면서 호밀리아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해 프래디카치오라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공적으로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며 “이때부터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회중 설교를 지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설교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프리칭(preaching)은 ‘프래디카치오’로부터 연유되었다”고 했다.
이어 “셋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설교와 관련해 등장한 용어가 세르모(sermo)이다. 이 용어로부터 파생된 설교가 오늘날 주로 행해지고 있는 연설식 설교(sermon)”라며 “연설식 설교는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 예배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보다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넷째,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설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종교개혁자들의 말씀 이해에 근거해 새롭게 제시되었는데, 바로 콘치오(contio)이다. 이 용어는 예배에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와 관계된다. 콘치오 형태의 설교는 예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다”며 “다시 말하면, 중세 교회의 공 예배에서 성찬 예식에 비해 이차적인 위치에 있었던 말씀 예전이 다시 중요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고, 설교자들의 관심과 회중을 만족시키는 데로 흘러갔던 설교를 다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최 교수는 “다섯째,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단어로는 케리그마(kerygma)를 들 수 있다(롬 10:17; 16:25; 고전 2:4; 골 3:16)”며 “복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설교의 가장 근본적 그리고 원형적 개념으로 예수의 생애, 고난, 죽음, 부활로 인해 인간에게 가능하게 된 부활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고 했다.
이어 “여섯째, 케리그마와 함께 선포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는 단어가 디다케(didacke)이다. 이 단어는 케리그마와 함께 예수의 마지막 분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중적인 것으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는 것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이라며 “디다케는 회당적 의미에서의 교육(마 4:23), 선교(행 4:2), 기독교 교리의 요약(딤후 4:3)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설교가 추상적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간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차원이어야 함을 내포한다”고 했다.
더불어 “일곱째, 설교와 관련하여 또 다른 용어는 세례받은 회중 가운데서 행해지는 말씀을 지칭하는 파라칼레오(parakaleo, 고후 5:20)이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삶의 실천과 관련한 의지와 행동으로서 ‘권고’(롬 12:1)와 신앙의 토대로서의 확신을 근거한 ‘위로’의 의미가 있다(고전 1:6)”며 “설교는 말씀을 통한 위로의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의미 있게 논의되고 있고 상담 설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물론 케리그마와 디다케와 파라칼레오는 기독교 초기에 설교가 어떤 내용을 주된 메시지로 취급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 용어들은 설교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보다는 설교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주된 방향과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어 “기독교 역사에서 광의적인 차원에서 설교는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와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져 왔다”며 “따라서 두 유형의 설교의 목적과 구조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첫째는 연설식 설교와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의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나누는 데 있다”며 “둘째는 하지만 설교 실행의 구조적 차원에서 차이가 있다. 연설식 설교는 좀 더 구조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강론식 설교는 비형식적이고 대화적일 수 있다. 셋째는 연설식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거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강론식 설교는 성경 텍스트를 설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석하는 데 있다”고 했다.
최 교수는 “강론식 설교는 대화를 통한 말씀 이해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강론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토론 또는 대화를 통해 어떤 주제나 내용을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따라서 강론식 설교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하며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형식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의 대화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설교자와 회중의 연대감, 즉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그리고 만인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분별하고 함께 선포한다는 의미”라며 “하지만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로 이해한다고 해서 예배 중에 설교자뿐 아니라 예배 참가자들이 모두 다 말하거나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화 설교는 설교자가 신앙과 삶의 문제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회중과 동등한 동료의 관점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지속적인 대화를 키워가면서 이를 반영하는 설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대화 설교가 추구하는 핵심은 교회 공동체의 대화를 촉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연구해 설교문을 작성하여 일방적으로 회중에게 연설식 설교로 마치는 것은 바람직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며 “교회는 설교의 원래 의미와 방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원래 대화를 통한 복음 이해와 나눔 성격이 강하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회중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로 이끌지 못한 설교는 진정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설교자는 연설식 설교 시간을 5~10분 정도 줄이고, 설교 후에 전한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자와 회중이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 메시지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며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설교를 들은 후에 다양하게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개인이 실천한 후에 목장이나 구역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며 기도할 때 신앙 체험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