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런 조크가 떠돌았다. “아들 워디 대학 갔대유?” “예, 화천대유” “그런 대학도 있남?” “입학금 500만 원 내면 졸업할 땐 500억 준대유” “다 좋은디 그 대학 나오면 깜빵간대면서유” “괜찮아유~ 대법관한테 50억 주면 무죄로 나온대유”
별의별 뉴스가 떠돌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는 국민들이 많다. 경우가 다르지만 본문에도 화난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의 분노는 대상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는 안가겠다고 하셨다가 초막절 중간쯤에 성전에 가셨다. 레온 모리스는 “예수께서 절기의 정점에서 교훈하기를 원하셨던 같다”고 했다. 명절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장소를 성전으로 택하신 것은 최대한 공개적으로 교훈하겠다는 의도셨던 것 같다. 그때 유대인들의 반응이 ‘놀람’(15절), 충격적이었다는 것인데 마태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않았기 때문”(마7:28-29)이라 했다. 그때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그 가르침의 영향력이 엄청났던 것 같다.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절) 뭘 가르치셨는지는 나타나지 않지만 갈릴리에서의 가르침 때와는 반응이 다르다. ‘이 사람’이라는 표현은 멸시적, 모펫(Moffatt)은 “이 무식한 녀석‘이라 해석했다.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무학자 주제에 어디서 가르쳐? 그런 반응이다. 그것도 ‘어떻게 글을 아느냐?’ 완전 경멸했다. 권위적인 사회에서나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랍비들에 의해 주도되던 제도 교육, 다시 말해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고 시비를 건 것인데 중요한 건 예수님이 어느 랍비에게 배운 분이 아니면서 바리새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교훈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놀랍게 여겼다’라는 말은 ‘그들이 당황했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문제인가? 가방끈에 대한 편견은 우리 사회도 만만치 않다. 그 편견으로 사람을 깔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가방끈과 인격이 비례할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지 않나? 칼빈도 정식 수도원이나 신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기독교강요』를 썼다. 성경 다음으로 귀중한 책으로 칭송받는 기독교 교리서의 걸작이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칼 바르트도 박사 학위 소지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현대신학의 교부로 인정받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진리에 대한 배움은 가방끈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한 대학 교수가 사공에게 물었다. “여보게, 자네는 철학을 아는가?” 모른다는 사공에게 “허허, 자네는 인생의 1/4을 잃었군. 그럼 혹시 지질학은 좀 아는가?” 역시 모른다고 대답하자 “자네는 생애의 절반을 잃었네. 그럼 천문학은 좀 아는가?” 이번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자네는 생의 3/4을 잃었네”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배가 기울어 둘 다 물에 빠졌는데 사공이 “교수님, 헤엄칠 줄 아세요?”하고 물으니 다급하게 “아니, 살려줘” 소리쳤고, 사공은 “교수님은 생애의 전부를 잃으셨군요”라고 했단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물에 빠진 그 교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처지인 것을 모르고 있다.
고전 『장자』에 나오는 포정이라는 백정은 소를 잘 잡는 달인이다. 어느 날 문혜군이 그 백정이 소를 잡는 모습을 보며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소를 잡고 각을 뜨는데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 것 같다. 너무 빠르고 정확하다. 문혜군이 “참으로 훌륭하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단 말인가?”하며 감탄했다. 그러자 포정이 “저는 소를 마음으로 잡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겸손하다. 그뿐이 아니다. “훌륭한 백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 백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칼을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칼을 19년째 사용하고 있고 잡은 소도 수천 마리에 이르지만 칼날의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도인이 다 된 백정이다. 그렇다. 진리는 학교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배운다.
17세기 부엌의 성자라 불리는 로렌스 형제를 보라. 그는 40년 동안 수도원 부엌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부엌의 성자’라 불린다. 그는 부엌일을 결코 사소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을 주님께 하듯 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로렌스가 이런 말을 한다.
“내게 노동하는 시간은 기도 시간이다. 내가 일하는 주방은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것저것 찾느라 분주하다. 그 속에서도 나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 중에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다. 무릎 꿇고 성찬을 받을 때와 똑같다... 꼭 큰일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도 다 끝나 더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 분의 은혜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일어날 때면 어느 왕보다도 더 만족감을 느낀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 족하다.”
정규과정을 나와야만 훌륭한가? 편견이다. 이걸 버려야 진리를 볼 수 있다. 당시 서기관들은 자기 것이 되지 않은 진리를 가르치면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많은 유명 랍비들의 말을 인용했지만 예수님은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교훈이라 주장하셨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절).
우리는 외모에 휘둘릴 때가 많다. 외모가 뭔가? 겉모양이 아니라 소위 가방끈, 명문대 타이틀 아닌가? 사람들은 학벌이 좋으면 그 인격도 훌륭한 것처럼 착각한다. 잘 보라. 우리 사회는 교수 타이틀에 편견이 있다. 그런데 교수나 의사나 판검사나 변호사나 목사나 그 인격은 배운 학식과는 별개 아닌가? 외모는 괜찮은데 인격은 오히려 별로인 사람들이 많지 않나?
총선이 다가오는데 누굴 뽑아야 잘 뽑는 것일까? 많은 국민들이 어느 당인지부터 보고, 그 다음은 경력을 보겠지만 각 당이 내세운 후보들 상당수는 교수, 판검사, 변호사 등 전문가들인데 그들이 정치를 잘하던가? 이전에도 늘 외모, 가방끈을 중시했지만 그들은 국민을 열광케 하기보다 열받게 했다. 거기서 거기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외모나 가방끈보다 사람됨을 봐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진리의 말씀을 전하실 때의 반응은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였다. 마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라던 반응과 “이는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2:7)라는 반응을 한 것과 비슷한 반응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외모, 다시 말해 가방끈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절)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교훈, “내 것”이라고 말씀하셔도 될 분인데 “내 것이 아니요”, 아직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는 상황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예수님은 당신 생각이 아니라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을 하고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순종하는 자세’가 더 돋보인다.
가끔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사람들 중에 순종의 자세는 없는 듯한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하고 싶은 일과 하나님의 뜻이 부합될 때에만 순종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도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것, 하나님 뜻 운운하며 그저 하나님을 이용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고아의 아버지이자 기도의 용사인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할 때 최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0%가 되게 해야 한다”고 했다. 99%의 순종도 불순종이라는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순종’과 동의어다. 자기 말이나 행동이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놀랍게도 이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다. 맑시스트 무신론자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 이 사람이 『사도 바울』이란 책을 썼다. 바울을 혁명적 인물, 마치 레닌에 비견되는 인물로 칭찬했다. 개인적으로 지지하지 않지만 그 이유를 ‘믿음’ 때문이라고 한 것은 좀 관심이 간다.
바디우는 은총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믿음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진리를 진리로 인식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자기가 깨달은 진리에 대한 충실성은 ‘사랑’이며, 그에 대한 승리의 확신이 ‘소망’이라 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바울은 믿음 사랑 소망의 사람, 그래서 사도 바울을 혁명적 인물로 다룬 것이다.
사실 믿음 소망 사랑의 원조이자 모범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교훈을 가르친다고 주장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916-17절). 행동으로 옮기면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가 보이는 것, 그래서 진리는 순종하는 자만 깨닫는 것이다.
또 그게 진리인지 아닌지는 목적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18절), 그 목적이 사람들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이게 중요하다. 행동하다 보면 그 목적이 보인다. 그러면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을 꿰뚫은 예수님은 모세의 제자라면서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세가 가르친 핵심은 놓치고 있다고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셨다. 그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고 율법을 어긴 사람 취급하는 그들이 오히려 율법의 핵심을 모른다며 근거없는 비난과 살의(殺意)를 반박하고, 난 지 8일째 되는 날이 안식일과 겹치면 할례도 행할 후 있다(레12:3)며 그들의 거짓 교훈을 들쳐내셨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23절),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말씀, 예수님은 권세 있는 말씀을 하셨다.
“귀신이 들렸도다”
무리의 대답이다.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절), 여기서 ‘무리’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각처에서 온 순례자들, 예루살렘 토박이 폭도가 아니라서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모르는 것 같다. 다만 예수님의 교훈이 ‘귀신들린 자의 소리’ 같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물론 속마음을 들킨 대적자들의 역공격일 수도 있다. 죽일 계획을 했어도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그래” 그런 표현일 수 있고, ‘귀신 들렸다’는 표현이 정적을 고립시키고 분열시키려는 마녀사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쪽이 맞든 이 말에 흥분할 것까지는 없다. ‘귀신 들렸다’는 말은 ‘미쳤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 그래서 오히려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받으면 된다. 꿈이 있는 사람, 자기 일에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 게으르지 않고 충실한 사람이라면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고 한 번쯤은 “미쳤다”는 말을 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진리를 발견했나? 그렇다면 진리에 목을 걸어야 한다. 확신을 가져야 한다. 열정을 쏟을 만한 진리를 찾지 못하면 병이 날 수도 있지만 열정이 가는 길에는 만병이 비껴서는 법, 아픈 것도 잊고 일할 수 있다. 진리로 오신 예수님께 열정적인 믿음, 사랑, 소망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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