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에큐메니칼 인간화 중심 선교의 한계점 극복

안승오 교수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전통적인 선교를 복음화 중심의 선교라 한다면, 에큐메니칼 선교는 인간화 중심의 선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개인구원 대 사회구원의 구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선교가 개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복음전도에 열정을 기울였다면, 에큐메니칼 선교는 사회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사회 구조악 제거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힘을 쏟았다. 즉 에큐메니칼 진영의 인간화 중심 선교는 사회의 구조악을 청산하고 그 사회 안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선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인간화 중심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복음화 중심의 선교는 지나치게 개인에만 중점을 둔 협소한 개념이고,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이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선교 개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지닌 에큐메니칼 인간화 중심 선교 역시 다음과 같은 면에서 심각한 한계점들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첫째, 사회를 구원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를 떠난 개인이 있을 수 없고 개인은 사회의 영향 아래 있다는 점에서 사회를 정의롭게 평화로운 사회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사회란 기본적으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를 아무리 좋게 만든다 해도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삶이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는 결국 불행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변화보다 전체주의적 사고 속에서 혁명을 통한 사회구조 변혁만을 시도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 사회 불행의 근원을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한 죄로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죄는 개인의 죄이며, 사회적 죄 역시 개인들의 죄가 구조화 된 것이다. 사회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개인이 죄를 지은 결과가 사회악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개인이 받는 것이고 구원받은 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회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기에 그것을 사회구원이란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적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사회구원을 말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회가 구원을 받은 사회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민소득이 얼마나 되고 국민행복지수가 얼마나 되어야 사회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민행복지수가 형편없고 독재와 가난이 심한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경제와 복지가 잘 되어진 나라의 국민들은 예수와의 관계성이 정립되지 않아도 자동으로 사회 속에서 모두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구원이란 관점은 상당히 애매모호한 개념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사회구원을 선교의 목표로 삼는 에큐메니칼 관점은 심각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교회가 과연 사회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문제 해결과 사회구조개혁의 문제는 매우 복합적인 문제이며 기본적으로 정치인들의 주된 과제이다. 교회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개론적인 차원에서 예언자적 외침을 외칠 수 있지만, 구체적인 각론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참으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것인가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교회가 정의와 평화를 외치고 주장하면 마치 그러한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강조하는 순진한 관점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는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충만함을 방해하는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할 것을 요구”하며, 또 말하기를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주변으로부터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주변에 있게 함으로써 중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과 맞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이루고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루는 등의 과제는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과제이고, 그런 점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과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탈무드는 하루아침에 바다를 만들려 하지 말라는 조언을 주고 있다. 교회는 바람직한 사회 변화를 위해서 교육, 언론, 봉사, 원조 등을 통하여 사회를 점진적으로 바꾸어가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 해방신학 등에서 강조하는 것과 같은 혁명 등을 통한 사회변혁에 교회가 앞장 설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고, 이런 경우 자칫 교회가 일개 정치단체로 전락하는 위험성 또한 존재함을 늘 인지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방식이 바람직한 방식이었다면 선교의 모범이신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셨어야 했을 것인데, 실제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독립과 인간화를 원했던 백성들의 요구를 듣지 않으셨다. 김명용이 말한대로 “예수는 폭력적인 혁명의 길이 하나님의 나라를 결단코 가져올 수 없다고 믿었던 분이셨다.”

셋째, 백번 양보하여 사회구원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구원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적 지지를 받기 어렵고 그런 점에서 수용하기 어렵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사용하므로 그 용어를 따라서 실제로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생각하는 사회구원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 그것을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에큐메니칼 구원 개념을 재정립한 방콕대회에 대하여 아더 글라서(Arthur Glasser)는 방콕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는 많은 말을 한 반면 전도에 대하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한 이중감정의 병존을 느낀다고 서술했다. 동방정교회도 방콕이 구원의 마지막 즉 하나님 안에서의 영생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사항이다. 하나님께 아무런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관심 등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을 구원받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신의 이익과 쾌락만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가 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유럽 사회의 모습을 과연 구원 받은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떠나 각종 쾌락, 동성애, 마약, 음란 등에 경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사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겠는가? 구원의 핵심사항인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을 소홀히 하는 사회구원의 개념은 결국 전도의 약화와 교회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선교의 목표로 삼기에는 심각한 한계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점에서 서정운도 “비록 성경의 기록이 더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보다 연민의 뜻을 표명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무죄성이나 구원의 불필요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 ... 선교를 우리 자신의 목표 달성이나 승리쟁취로 여기는 성향이 사회정의와 평화를 도모하는 선교에 나타나는 것이 흠이다.” 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인간화 또는 사회구원을 중심으로 하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목표는 많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즉 에큐메니칼 인간화 중심의 선교는 다분히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의 이익,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생각에 더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인 경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보인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선교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변혁할 때도 단순히 인간들이 잘 살고 편안해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겨지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삶을 사는 개인들이 많아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런 개인들을 양육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는 선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선교의 최종적인 목표가 될 때 에큐메니칼 선교가 추구하는 것도 제대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선교학)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승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