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예루살렘 성(城)의 종말
누가는 예루살렘 성(城)의 종말에 관한 예수의 예언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0). 예루살렘의 멸망이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었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눅 21:22).
복음서 저자 누가는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에 관한 예언(막 13:14)을 주후 70년 초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와 관련시킨다. 황폐 자체는 그 해 여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성전의 점령및 파괴와 관련된다(눅 21:20):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눅 21:23).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 21:24).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때가 있다. 예루살렘이 무한정 황폐되지는 않는다. 그 때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이다.
예수의 예언이 있은지 약 40년 이후인 서기 70년(A.D. 70) 초순에 유대 열심당이 무력적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전면전을 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한 로마군의 실제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유대의 열심당원들(the Zealots)이 로마에 대해 무력 반란을 일으킨 것이 그 원인이었다.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을 유린당한다. 성은 돌 하나 돌 위에 남기지 않고 폐허에 이른다.
주후 70년 이후에도 유대의 독립을 위한 열심당의 두 차례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주후 115-117년에 구레네(Cyrene), 애굽, 구브로(Cyprus),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나 트라얀(Trajan) 황제는 상당한 살육을 감행하여 이것을 진압하였다. 주후 132-135년에 바르 코흐바(Bar Kochba, 별의 아들)가 주동이 된 반란이 있었다. 로마 하드리안(Hadrian) 황제는 이 반란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분산된 유대인의 남은 자들을 궤멸하였고 로마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혹독한 제한조치를 취하였다. 하드리안 황제는 성전 자리에 이교도(異敎徒) 신전(神殿)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7세기에 무슬림(Moslem, Muslim, 이슬람교도)이 이곳에 왔을 때 성전산은 폐허로 변한 쓰레기로 덮혀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성전산의 큰 바위에서 무함마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691년 황금사원으로 불리우는 바위 돔을 건설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V. 세대주의적 성경(예루살렘) 해석의 위험성
오늘날 이스라엘의 성지(聖地) 예루살렘에 가보면 솔로몬의 성전도 헤롯의 성전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 이후 40년인 주후 70년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되었고,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역사적 예루살렘 성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우리들에게 더 이상 의미있지 않다.
유대인들이 초대교회의 집사 스데반을 처형하기 전에 고발의 내용에서 다음같이 말한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행 6:14).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행 7:49-50). 이는 구약 이사야의 예언서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사 66:1-2a).
오늘날 우리가 찾아야할 진정한 성전이란 성지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성전이요, 신약의 신령한 성전인 교회로서의 성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신령하게 변모(變貌)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신자의 마음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6:19)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베드로는 여기서 비유대인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너희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 복음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주의해야할 것은 세대주의적 성경읽기(무디 및 스코필드 성경 등)로 예루살렘을 유대민족에게만 연관시키는 해석이다. 그리하여 세대주의자들(dispensationalists)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예루살렘에 관한 모든 성경의 기록을 민족적 유대와 유대주의적 성지(聖地)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구속사적 의도를 유대 민족주의적으로 편협화 하는 시도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자기를 향한 인격적 신뢰를 표명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면서 칭찬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신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리고 오히려 유대 백성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갈 것을 예언하신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2). 이 말씀은 신약교회의 탈(脫)유대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믿음을 지닌 자들이며, 메시아인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유대백성들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마가복음도 같은 의도를 가르친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을 여행하실 때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방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한다. 예수는 처음에는 유대 민족 중심의 대답을 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27절의 대답에는 당싱 비유대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기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긍휼을 믿는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에 예수는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 예수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겸손하고 집요한 간청은 하나님 백성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린다. 예수는 이방여인과 그 딸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도 혈통으로 난 유대인과 하나님의 뜻으로 난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유대인들은 말씀으로서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혈통주의나 민족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분명히 유대 민족 일변도 성경 해석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령한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관한 성경의 의미를 세대주의자들이 읽는 바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의 이분법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VI. 새 예루살렘: 믿음 안에서 약속된 종말론적 실재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구속사의 종말론적 상징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사라져 버린 옛 세상 대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들어서는 묵시적 비전을 기록하고 있다. 바다라는 혼돈의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리어 다가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환상으로 보고 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 21:10-11).
새 예루살렘은 상세히 묘사되어진다(계 21:12-21). 이 도시의 성벽은 거대한 정육면체(피라밋 형태의 답)의 형체를 띠었다. 그 크기는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이다. 이러한 수치는 실제 규모이기보다는 완전성(정육면체) 또는 우주적 규모를 상징한다. 이 도시는 새로운 세계이다. 이 성벽의 크기에 관한 정보에는 12라는 상징적인 수(이스라엘의 열 두지파, 열 두 사도) (계 21:14)도 들어 있다. 이 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한다. 이 도시는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 진주, 정금 등 각종 값비싼 보석으로 건축되었다(계 18-21). 그러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전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어린 양이 친히 그 도시 안에 계시고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 안에서 종교와 우주와 세상이 하나가 되는 장면이다.
옛 예루살렘은 본래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성전 가운데 임재하시던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과의 언약(covenant)에 대하여 신실하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구원과 소망의 도시는 음모와 분쟁과 싸움과 파괴,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도시를 우리들에게 주신다. 새 도시는 인간이 건설한 도시가 아닌 하나님이 건설하시는 새로운 천상의 예루살렘 도성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계 21:23-25). 새 예루살렘은 오직 믿음 안에서 소망할 수 있는 종말론적 실재(eschatological reality)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옛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에 의하여 종말론적으로 능가되고 추월되고 있다. 그래야만 옛 언약의 실재인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이 천상의 새 예루살렘은 만국의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계 21:26). 그러나 누구나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속(俗)된 자나 가증한 자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오로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만 들어간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 21:27). 오늘 우리는 옛 눈을 가지고 분쟁의 도시 예루살렘을 바라 볼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성지(聖地) 예루살렘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인 우리들에게 타당한 구속사적 의미이다. 옛 예루살렘은 다가오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예표로서만 우리들에게 의미를 지닌다. 옛 예루살렘은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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