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훈 목사(발안예향교회)가 2일 복음과도시 홈페이지에 ‘남은 권위마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전 목사는 “목사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교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너무나 쉽게 교회를 옮길 수 있고 그렇게 옮겨간 이들을 다른 교회들이 환영해 주었다. 제자훈련과 큐티가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에 또 다른 자만심을 심어 주게 했다. 목사님의 설교와 내 큐티가 다르면 목사님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며 “이는 이단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또한 “목사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생겨나는 또 다른 폐단은 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며 거짓 학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이라며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목사의 권위를 세워보겠다는 대부분의 시도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덧붙였다.
그는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권위논쟁이 한 번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다”며 “군중의 환영을 받고 입성하신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어 쫓으셨다. 그리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모든 일은 당시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성전에 들어가 이제는 가르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지 따져 묻기에 이른다”며 “말하자면, 교사 자격증이 있냐는 것이다. 당시에는 공인된 랍비만이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었다. 이 권위논쟁은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는 좋은 흉계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권위논쟁에서 세례 요한의 권위를 근거로 저들의 흉계를 무너뜨리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명령에 큰아들은 대답만 하고 순종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 하고 나중에 순종했다는 이야기”라며 “이 이야기를 통해 권위는 순종과 관계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케 했다. 즉 하늘로서 받은 권위라도 순종하는 자에게나 그 권위가 통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고 했다.
전 목사는 “예수님의 권위논쟁을 이해하려면 좀 더 넓은 그림을 보아야 한다. 권위논쟁에 앞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일어난다. 마가의 기록을 참조하면 성전에 들어가기 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사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며 “그리고 다시 나오다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게 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1~22)”라고 했다.
이어 “이 말씀은 기도할 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기도는 믿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받은 줄로 믿고 미리 헌금을 한다고 해서 ‘선불집사’라는 희한한 단어까지 등장했었지요. 한국 교회이기에 가능한 코미디”라며 “또한 이 말씀은 성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며 성도를 정죄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또한 “무화과나무 저주에서 나오는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성전이 있던 시온산더러 들려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해 바다에 던져지라는 뜻이 들어 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다”며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거든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신 것처럼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시온산을 심판하실 수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심판하실 수 있는 그 시온산에서 재판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이 죽기 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들’ 중에 시온산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다”며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권위로 징벌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 죽으시면서 그들을 위한 변호를 하셨다. ‘악함’ 때문이 아닌 ‘알지 못함’ 때문이니 용서해 달라고 말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권위논쟁을 벌이던 자들에게 질문하셨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아들마저 죽인 이들을 포도원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라며 “이에 저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 21:41)라고 답한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권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예수님은 이어서 왕의 혼인 잔치를 비유로 다시 권위를 설명하신다. 왕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왕은 그의 권위로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 했던 것”이라며 “심지어 예복을 입지 않아도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지게 된다. 권위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만약 저들의 권위논쟁에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이 보내신 권위임을 말씀하셨다면 저들의 결말은 ‘진멸당함’이다. 예수님은 저들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으셨다”며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권위 없는 자가 되어 권위 있다는 자들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저들이 당해야 할 ‘진멸당함’을 본인이 대신 당하셨다”고 덧붙였다.
전 목사는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온유함이 승하신 분이시다. 물론 권위도 훨씬 더 크신 분이셨다. 예수님이 권위논쟁에서 답을 회피하신 이유가 바로 그 권위 앞에 진멸당할 저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며 “권위를 앞세우면 저들은 심판의 대상이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저들은 ‘변호’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 시대는 탈권위의 시대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보다 친구 같은 아버지가 대세이다. 선생님들도 권위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분이 존경받는 시대”라며 “권위를 내세우면 시대를 역행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한국 기독교가 권위를 세우려다 도리어 망한 케이스”라고 했다.
아울러 “권위는 스스로 내려놓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신다. 어차피 땅에 떨어진 권위이다. 누더기가 된 권위를 다시 주워 입으려 하지 말고 이참에 예수님을 본받아 조금이라도 남은 권위마저 내려놓고 성도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살 길”이라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재훈 #전재훈목사 #발안예향교회 #복음과도시 #칼럼 #권위 #기독일보 #기독일보일간지 #기독일보일간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