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를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백과사전식 정보만 알 뿐 그 사람의 실재와 내면을 알지 못하면서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산다.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판단과 평가도 그랬다. 그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믿지 않았다. 믿음이 행복의 근원인데 유대 땅에서 공생애를 산 최고 인기스타이셨지만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뿐, 의심하고 오해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며 탄식하신다. 문제는 그들만 탄식의 대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는 이 탄식은 우리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서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을 때 안식일을 범했다고 난리치고, 하나님과 하나라는 주장에 분개하며 죽이려고 달려드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질책이다. 그들의 불행은 믿음이 없는 것, 이게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불행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당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뿐인가? 많은 증거들이 자기들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런데도 끝까지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명과 심판의 주라는 사실을 선언하며 증언이 있다고까지 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왜 오셨는지’에 대해 이해하기는커녕 마치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오죽하면 예수께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라고 하셨을까?
믿음 없음을 탄식하신 말씀, 한편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힌 말씀이기도 하다. 핵심은 ‘영생’, 예수께서 죄인을 용서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주는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주려고 하시는 최고의 선물인 영생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거다. 그저 엉뚱한 소원, 유치한 요구만 하며 예수님을 찾는다. 병 고침 받고, 떡 얻어먹기 위해, 또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표적' 따위를 요구하며 예수께 나아왔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상황, 이건 믿는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거부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예수님이 사회사업가로 오셨나? 아니면 정치 지도자로 오셨나?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다. 그런데도 이건 마치 사회사업가나 정치 지도자로 전락시키는 꼴이다.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을 주려고 오신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우리 육신의 병을 고쳐주려고 오신 무료 시술 의사도 아니고, 이 땅에 정의 구현이나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오신 정치 지도자도 아니다. 예수님은 구세주로 오셨다.
안타까운 것은 교인들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학에 붙게 해주고 취업하게 해주시는 분, 직장에서 승진하게 해주고 사업을 번창하게 해주시는 분 정도로 여긴다는 것이다. 아무도 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보다 시시하고 유치한 고깃덩어리만 얻으려고 하는 기막힌 상황,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두드리신다. 우리가 그 문을 열고 영접하기만 하면 영생이다. 엄청난 선물, 부디 그 선물을 거부하고 엉뚱한 소원만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큰 부동산 회사는 가끔 고객들 가운데 무작위로 추첨해서 집을 한 채 공짜로 주는 때가 있다. 그럴 때 회사 대표 한 명이 당첨된 사람을 찾아가 축하하고 집 한 채를 공짜로 준다며 열쇠를 건네준다. 그런데 당첨된 사람이 믿지 않고 “사람 놀리지 말라”며 “차라리 매달 내는 집세나 좀 깎아달라”며 열쇠를 거부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나?
문제는 그런 성도가 너무 많다는 거다. 왜 그럴까?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심부름꾼 정도로 격하시키고 그걸 믿음 생활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뭔가? 그건 먼저 마음이 달라지는 거다.
박군의 심령이란 화보가 있다. 첫 그림은 박군의 심령을 사단이 지배하는 그림이다. 마음에 개구리(남의 말), 뱀(속임수, 미혹), 표범(혈기), 거북이(게으름), 돼지(탐욕), 염소(욕망), 공작새(허영심)가 들어있다. 복잡하다. 그러나 다음 그림은 성령이 들어가시면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이고, 그 다음 그림은 성령의 지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그림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마음을 그린 그림이다.
유대인들은 마음을 열었어야 했다. 그래야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예수님은 아예 작정하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질책하셨다. 믿지 않는 것이 질책의 이유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유일한 중보자로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박해하는 교권주의자들은 속으로 ‘저 예수가 지금 자기가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고 우리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영광 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인데, 웃기고 있네’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까지 다 읽으신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절), 너희에게서 그런 영광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본문에서는 ‘영광’이란 단어가 핵심 단어(key word) 중 하나다. ‘영광’은 “사람에게서 취하는 영광”(41절)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44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영화, 빛남, 구별됨’이 아니라 ‘찬사, 인정’, 사람에게서 취하는 영광이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 타령하며 실제로는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그들로부터 어떤 인정이나 칭찬 따위도 받고 싶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다(43절). 사람이 누구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광”(44절)이란 말씀은 성부 하나님의 대사 자격으로 오신 유일한 중보자이시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절)라고 했다. 여기서 '자기 이름으로 오는' 것이란 자기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정치인들이 하는 짓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44절),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사람의 영광을 취하는 악습에 젖어 있음을 책망하셨다. 경건을 과시하고, 스스로 거룩하고 선한 사람인 체하며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는 사람들, 그들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에만 관심이 있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라 정작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인 예수님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그러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탄식하신 것이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스토우(Harriet Elizabeth Beecher Stowe) 부인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라는 책을 썼다. 미국에서만도 1년에 30만권 팔렸고, 20여개 국의 외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읽힌 너무도 유명한 책이다. 30년 동안 한 권의 소설책도 읽어본 적이 없는 팔마스톤 경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이 책은 이야기로서 훌륭할 뿐만 아니라 정치의 도(道)를 보여주는 데에도 훌륭하다”고 극찬했고, 톨스토이는 “이 책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국가 자문기관 추밀원의 고문관이었던 콕번 경도 “이 책은 다른 어느 소설책보다도 인간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적인 극찬이 저자에게 쏠리자 스토우 부인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내가 저자라구요? 노!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는 이 이야기 내용의 상상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은 주님이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비천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차례차례 환상으로 보여졌고, 나는 단지 그것을 옮겨 놓은 것뿐입니다. 모든 영광과 찬사는 오직 주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한 세기를 밝혔던 스토우 부인이 자기 재능을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한 수많은 찬사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렸다. 멋지지 않나?
그런데 오늘날 종교인들마저 ‘자기 이름’을 과시하고 ‘사람의 영광’을 너무 좋아한다. 교황을 위시한 가톨릭 사제들은 마치 자기네들만 지극히 거룩하고 경건한 체 과시하며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을 '신부'(Father)라고 부르게 하고 자기들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도록 강요하는 등, 중보자 행세를 한다. 그리고 좀 괜찮게 살았다 싶으면 '성자' '성녀'로 추대하고 그 앞에서 촛불 켜고 기도하게 한다.
불교도 그렇다. 도를 좀 닦았다 하면 고승이라 하여 받들어 모시면서 한번 만나 뵙기 위해서는 '삼천 배'를 해야 한다는 둥, 사람을 신처럼 섬기게 한다.
기독교는 어떤가? 세상이 좀 다르게 보나? 코로나 시기, 신천지의 맹활약(?) 덕분에 국민들에게 이기적인 집단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혹시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다면 그건 인본주의일 뿐, 이단과 우상 종교와 다를 바 없다.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자칭 하나님이 아니라 38년 된 병자도 고치는 생생한 퍼포먼스를 통해 스스로 당신을 계시하셨다. 하지만 죄인이며 탕자된 우리를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해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질책하셨다. 묻는다. 혹시 우리를 향한 질책은 아닌가?
성자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끝까지 당신을 거부하고 오히려 죽이려 하는 유대 교권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45절)고 하셨다. 고소 대상이지만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고소할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모세라 하셨다(45절). 입만 열면 “율법, 율법”하는 그들을 향해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온 모세가 고소한다는 거다.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모세가 자기네 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신다. 모세야말로 예수님을 증거한 대표적인 선지자라는 것이다(46절).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성경 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경건 과시와 율법 지식 자랑을 위함이었다. 그러니 구약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주제조차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 그야말로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 사람들‘, ‘모세의 제자’로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모세의 증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중에 모세로부터 고소당할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오경만 해도 창세기 3장 15절을 필두로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약속들이 곳곳에 가득하다. 또한 전 구약성경에 아담, 멜기세덱, 여호수아, 다윗 등 오실 메시아에 대한 ‘표상’(typology)들이 수두룩하다. 그뿐인가? 메시아의 탄생 장소로부터 그의 특별한 생애, 고난과 승리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메시아에 대한 직, 간접 예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엮어가는 주제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은 오직 한 사람, 그 선지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에 대해서도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다”(46절)라고 간단명료하게 단정 지으셨다.
예수님은 ‘그의 글’을 믿는 것과 ‘내 말’을 믿는 것을 동격 취급하신다.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47절), 성경 믿는 것이 곧 예수님 믿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묻는다.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나? 혹시 4대 성인 중 한 분이라 생각하나?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나? 아니지 않나? 성경은 예수님을 ‘구원의 길’(the way)이라 했지 단 한 번도 ‘구원의 길 중 하나’(a way)라고 표현한 적 없다(요14:6, 행4:12). 그런데도 세상은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한 분이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주, 아무리 대단해도 피조물이 하나님과 동등이라니? 아예 레벨이 다르지 않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이미 하나님,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시다. 당신의 자존(自存)하심에 대한 자증(自證)을 성경 66권에 기록하고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39절)이라 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죄인의 구주’ ‘장차 다시 오실 심판주’라고 증거한다. 성경이 기준이다. 알량한 지식과 상상으로 멋대로 예수님을 판단하며, 예수님을 미쳤다고 격하시키거나 사기꾼 교주쯤처럼 여긴다고 그런 분 되시나? 아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님을 ‘그리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증거한다.
그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려는데 거부하고 '썩을 떡'이나 기다린다면 그건 어리석은 거다. 끝까지 오해하면 자기만 손해다. 민간 암행 나온 임금을 못 믿겠다고 한다고 임금의 신분이 달라지나? “내가 이 나라의 임금인데 내일 아침, 대궐 문 앞으로 오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믿고 따르면 소원을 성취하지만 끝까지 불신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것, 기억하라.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