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계변혁의 근본적인 동력으로서의 복음전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에큐메니칼 관점에서의 전도는 매우 이기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행동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샬롬과 정의를 이루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행동으로 비쳐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의 개인적인 삶을 바꾸게 되고, 그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사회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사회의 변혁은 시대적 상황과 그 사회의 상황에 따라 속도와 규모 등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고 실천되는 한 변화는 일어나게 되어 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면 회개가 일어나고 그 결과 각종 범죄 및 문제들이 해결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점에서 사이더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제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한 죄에 근거한다. 약물중독자들이나 성적으로 무책임한 죄인들이 회심할 때, 사회는 개선된다. 압제자들이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의를 회개할 때, 사회는 개선된다. 새로운 사람들은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한다.”라고 분석한다. 복음은 그 복음을 받은 “...마음에 살아계시며 세상에서 통치하시는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억압의 구조들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이더는 “사회운동은 복음전도로부터 결과한다.” 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기구들이 존재하고 그 기구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의 변화에 기여한다. 예를 들면 학교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면서 그들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병원은 병을 치유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간다. 기업들은 더 좋은 물건과 서비스들을 만들면서 세상의 변화에 기여한다. 복지기관들은 복지사역을 수행하면서 세상을 좀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이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의 조직이 모든 것을 다 하지는 않는다. 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면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조직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잘하면서 한 사회가 발전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명의 진리로 사람들을 바꾸고 그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길인 것이다. 교회가 이 길을 소홀히 하고 사회복지사업, 환경운동, 노동운동, 정치운동, 인권운동 등을 통해서 세상 변혁을 꿈꾸면 교회는 결코 효율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교회가 이상과 같은 사역에 대해서는 관련 단체들보다 결코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고 전문성과 인력 그리고 재력 등에서 훨씬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이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 선퀴스트의 말대로 “복음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과 자신들에 대한 잘못된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들에 대한 선한 진리(또는 선한 소식)를 수용하도록 사람들을 부른다. ...... 마침내 회심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을”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는 기독교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 다양한 변화들을 이루었는데, 이원규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전통적인 문화와 협동적 구조가 쇠퇴하면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시기에, 믿을만한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앙은 실용적이며, 정신적 육체적 구제의 한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구성원들에게 공동체적 소속감, 자신이 직면한 환경 너머에 희망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다른 이들(특히 불운한) 돌보기를 권장하는 도덕적 기초를 제공한다.”
특별히 복음전도의 과제는 오직 교회에만 주어진 사명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사역들은 세상의 다양한 기구들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복음전도는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어떤 기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브라텐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달할 수 있도록 세례 (보편적 제사장직)를 통하여 부름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주시지 않은 대위임령을 교회에 주셨다” 고 말하면서, 그런 이유에서 “만약 교회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그 누구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 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복음전도인 것이다. 소위 말하는 통전적 선교는 복음전도와 사회봉사 또는 사회변혁에서 각 요소들의 경중을 가릴 수 없이 모두 똑같이 중요한 선교의 과제라고 보면서 결국 선교의 핵심사역인 복음전도의 위상을 약화시킴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핵심사역을 놓치게 만드는 우를 범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와 같은 통전적 신학이 보편적으로 수용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의 풍조와 맞고 수행하기 쉬운 봉사와 공존 쪽으로 기울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전도는 점점 더 소홀히 되고 결국은 교회 자체가 약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감소하는 교회들이 이런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전도가 핵심이며 가장 우선적인 과제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갈수록 전도가 어려워지는 상황
2천년 역사 동안 복음이 쉽게 전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복음은 항상 피를 흘리는 헌신과 순교를 통하여 전해져왔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를 향한 박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가톨릭 저널리스트인 안토니오 소치의 주장을 정리하면서 전호진은 “...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약 7천만 명이 순교하였는데, 순교자의 3분의2인 4천5백만 명은 지난 100년 동안 순교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오히려 근래에 이르러서 더 큰 박해를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순교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지난 100년 동안의 박해자는 구소련, 공산정권 중국, 나치였다. 1990년 이후 매년 160,000명이 해마다 순교하는데, 박해 국가는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인도, 르완다, 남아메리카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주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로부터 순교 당하였다. 과거 100년 동안은 주로 공산주의 국가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면 1990년 이후 박해는 주로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도 공산주의와 이슬람권에서는 크리스찬들을 향한 엄청난 박해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도의 힌두 권과 동남아의 소승불교 권에서도 기독교를 향한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보고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살아남기도 힘든 이런 상황에서 복음전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지구촌 한편에서는 기독교를 향한 노골적인 박해가 진행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기독교에 위협이 되는 상황들도 전개되고 있다. 먼저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경제가 성장하면 대부분 신앙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원규는 그 원인에 대하여 “정체성 위기, 의미의 상실, 경제적 및 사회적 박탈감과 같은 문제들이 안정된 정치 체계, 경제 구조, 사회 질서 안에서는 많이 해결되고 보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한다. 즉 사회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신을 찾을 필요를 많이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 향상으로 인한 여가 산업의 확장과 여성들의 사회 참여 등이 교회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이원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여러 가지 취미, 오락, 유흥을 위한 편하고 다양한 시설들, 도구들, 방법과 수단들의 발달은 이제 복잡하고 지쳐 있는 현대적 삶의 리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특히, 승용차의 증가, 도로망의 확장, 휴양지의 개발 등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휴식 및 위락을 위해 주말에 도심을 떠나가게 만들 것이고, 이것은 교인들의 교회 출석율을 감소시킬 것이다. .... 원래 여성들이 더 종교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여성들이 취업하고 경력을 쌓는 일에 몰두할수록 종교에의 참여도는 감소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전체 교인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교회 참여도가 앞으로 그들이 사회 진출을 많이 할수록 떨어질 것이 예상된다.”
또한 상대주의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으로 사람들은 절대 진리나 절대 가치 등을 선호하지 않는 사고구조를 갖게 된다. 다원화의 상황에서는 절대성이 거부되고 상대성이 환영받는 경향이 강해진다. 즉 한 사회 안에 있는 여러 다양한 문화들과 생활 방식들을 환영하고 이런 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고 믿는 반면에 절대화는 불공평하고 교만한 편견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예수’를 핵심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 복음은 배척당하기 쉽다.
이상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기독교 복음은 엄청난 박해의 상황 하에 놓이거나, 무가치하거나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 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두 상황 모두 복음전도에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난공불낙의 철옹성과 같은 장애물들이 복음전도의 길 앞에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전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갈수록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일을 할 때 과제의 난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고등학생에게 수학에 투입하는 공부시간과 사회과목에 투입하는 공부시간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려운 과목에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성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전도의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만큼 교회는 복음전도를 위해 더 많은 노력과 헌신을 바쳐야 할 것이다. 복음전도가 여전히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V. 요약 및 전망
2천년 역사 동안 기독교는 복음전도를 선교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삼고 선교를 수행해왔다. 복음전도는 선교의 핵심 과제였고 동시에 선교의 핵심목표였다. 선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활동들은 대부분 복음전도와 그로 인한 영혼구원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선교의 개념 자체를 구령을 위한 활동보다는 세계의 샬롬 구현으로 보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탄생과 함께 에큐메니칼 진영은 전통적인 복음화 중심 선교를 1) 온정주의와 우월의식, 2) 배타성, 3) 물량주의와 개종주의 등으로 비판하면서, 1) 전도보다 공존을 강조하는 경향, 2) 선포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경향, 3) 전도의 범위 확장 및 상대화 경향을 보이면서 결과적으로 전도를 약화시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지적을 잘 귀담아야 듣고 교정해야 할 부분은 교정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교를 수행하면서 자세와 방법을 바르게 함을 넘어서서 선교의 목표 자체를 수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선교의 목표 자체는 교회가 정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변경된 목표를 주시지 않는 한 이 목표는 변치 않고 진행되어야 한다.
특별히 복음전도는 선교에 있어서 중심이며 핵심이다. 선교에서 다양한 사역들이 진행된다고 해도 거기에 복음전도의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결함을 지닌 선교가 될 수 있다. 복음전도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3장 16-17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최대 관심 사항인 것이다. 또한 세계를 변혁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 다름 아닌 복음전도라는 점도 전도가 핵심적인 선교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는 갈수록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기독교와 복음전도를 강하게 핍박하는 세력들이 존재함과 동시에 기독교 복음을 아주 무가치하고 진부한 것으로 취급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통전적 신학에서와 같이 복음전도를 여러 다양한 사역 중 하나 정도로 인식하고 복음전도에 쏟는 헌신을 약화시킨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것이다. 따라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는 선교를 수행할 때 상황에 맞는 다양하고도 효과적인 전략과 자세를 취하되, 여전히 복음전도를 핵심적인 목표로 삼고 헌신해야 할 것이다. (끝)
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선교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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