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날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내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후 6:17~18)
1. 구원의 최종 단계
구원의 서정 중 이제 마지막 단계인 영화에 이르렀습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구원의 서정을 시간적으로 나누면 과거의 사건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건으로 나눕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위한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고 구원의 긴 여정에 동참했습니다. 구원을 출발함과 동시에 우리는 거듭남을 체험했고 믿음과 회개와 칭의와 양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화와 견인의 과정에 있으며 이제 주님의 재림과 함께 구원의 최종 단계인 영화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성화와 영화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성화는 이생에서는 완성되지 않고 죽음으로 마감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화는 죽음이라는 관문(hurdle)을 지나 주님의 재림과 함께 영화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완성을 위해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있습니다. 더욱 믿음이 성장하고 인격이 성숙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라 해도 모든 성도들은 지금 성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더딘 성장과 성숙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난하거나 조롱하거나 험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변화를 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일을 입에 담는다는 것 자체가 교만일 것입니다. 겸손이 믿음의 인격입니다. 겸손이 자기 개혁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지금부터 2주간에 걸쳐 우리는 죽음의 문제와 죽은 뒤 우리의 영화와 영생에 관한 것들을 배울 것입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미리 듣고 배운다는 것은 큰 축복일 것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인지를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성도님들에게 주어진 축복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영화의 교리를 배우기 전에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인생의 향방이 모호해지고 목표 없는 떠돌이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죽음에 대해 더 깊고 정확힌 성경적 지식을 갖추기를 원합니다.
2. 죽음이란 무엇인가?
첫째, 죽음은 이생의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 아래 태어나 죽음을 맛보며 이생의 사람을 하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런 점에서 죄에 대한 형벌입니다. 역사상에 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영생을 하기 위해 전 세계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죽지 않는 약초를 구해오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던 영생초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맞이합니다. 수명을 다해 죽든, 질병으로 죽든, 사고사로 죽든 죽은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둘째,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은 다른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형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죽음의 값을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성도의 죽음의 값, 성도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정죄’를 행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순간에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 그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큼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이 소망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를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빌 1:23)
한편, 이미 먼저 죽은 자들 중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 지금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을 하나 더 경청해 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천만 천사와 하늘에 속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반면에 불신자에게 죽음은 영벌입니다. 불신자는 죽은 즉시 영원한 형벌이 들어갑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묵 16:24~26)에 보면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여 있다고 증언합니다. 불신자들은 그곳에서 주님의 재림의 때에 육신과 함께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오직 심판 받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선고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셋째, 한편으로 죽음은 타락한 세상과의 이별이자 성화의 완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이생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타락한 세상에서 더 이상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 해도 하나님의 작정하신 목표지점, 즉 성화의 완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완전한 성화는 죽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한 사람의 성도에 내재된 모든 죄악과 부패와 타락의 요소들을 말끔히 지우는 거룩한 세례이자 깨끗케 하시는 청소작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하나 해 봅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혜택을 즉시로, 단번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시키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 하나씩 점진적으로 적용되도록 하셨을까요?”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이런 질문이 성립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근거로 이 세상에서 악을 단번에 싹쓸이하듯 없애시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화의 방법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그분은 자처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었으며(히 2:10) 스스로 순종함을 배우셨습니다(히 5:8).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이러한 고난의 연단을 받아 스스로 믿음의 성장과 순종을 배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성도가 죽기 전에 여러 가지 작정과 섭리로 한 사람의 신자를 성화시키도록 그를 연단시키는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식을 온실 속에서만 키우지 않습니다. 그를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고생이 무엇인지를 맛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연단을 시키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서 성공한 자녀들은 훌륭한 부모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연단들도 많습니다. 가령, 어떤 신자에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을 통해 연단하기도 하고, 어떤 신자는 오직 충성함으로 세상 복락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도록 연단시키십니다. 무엇보다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너무 일찍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도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뜻은 우리 인생들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것임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그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른 뜻이 계시어 데려가신 것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이 권면의 말씀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 (계속)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