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공존·상생, 연대·협력하는 생명 공동체의 회복이 인류의 생존과 안녕을 보장한다.
COVID-19 사태의 장기화 속에서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은 거의 전 세계적인 현실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 공평 및 정의를 정착시키는 일은 특히 21세기 기독교에 명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일 뿐 아니라, 오늘날 글로벌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는 제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 과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공동체적 연대를 무시하는 강자의 약육강식이 생존모델로 정당화됨으로써 따뜻한 인정의 그물망이 사라져버린 사회, 승자와 패자가 엄연히 구분되고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함으로써 디스토피아(dystopia)가 도래하는 사회, 유능한 사람만이 이상적 인간형으로 부각됨으로써 성공과 출세라는 무한경쟁의 톱니바퀴에서 뒤처진 사람을 실패자·낙오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사회 안에서 절망하는 사회구성원 상호 간에 생존과 협력을 독려하고 공존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생존모델을 몸소 실천하며 사회적 에토스(etos)를 개혁하는 일 역시 21세기 기독교에 부과된 과제이다.
COVID-19 팬데믹이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골을 더욱 깊게 하고 사회 약자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하자, 사회·경제적 위기 타개책으로 기존의 사회 안전망을 새롭게 재설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불일 듯 일고 있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이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매달 일정액을 정기적으로 지급함으로 국민 개개인의 기본 생계를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 보장제도’(이하 기본소득제)를 새로운 사회 안전망으로 제안하는 상황 속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는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시대의 첨예한 화두다. 사실 수세기 전부터 빈곤과 불평등을 해소할 방안으로 모색되었던 최소생계보장이나 사회보험제도가 오늘날 기본소득제로 형태가 바뀌어 논의 중인 것이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찬반 논란 이전에 성서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보편적 기본소득제가 아닌 선별적 서민복지 강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신 10:18-19). 이제는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는 장기 실업자나 미취업자의 사회적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여러 형태의 복지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기본소득제에 찬성하는 진영에서는 일자리 절벽에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촘촘한 사회 안전망 구축 차원에서 막대한 재정투입이 불가피해졌다면서, 기본소득제의 핵심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기본소득이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고질적 소득격차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소득 재분배 제도, 사회 양극화에 대한 해법으로 여겨짐으로써, 국가가 최소한의 기본적 삶을 보장하는 사회 안전장치이자 지역경제를 살리는 경제정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실업의 대비책으로 기본소득제가 주목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제를 찬성하는 입장은 사회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는 팬데믹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기본소득제의 조속한 도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제에 반대하는 진영에서는 특히 우리나라가 기본소득제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정기적으로 조달할 만큼 국가적 재정 상태가 견실하지 않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더욱 걱정스러운 부분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달리 공기업의 비중이 대단히 높은 데다 공기업 부채 수준이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경제성장이 계속 침체할 거라는 전망도 국가 재정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미 급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가 의료복지 지출과 국민연금 급여액을 증가시키고, 저출산에 따른 경제활동인구의 감소가 세수 기반을 축소시키고, 국민연금 보험료 수입 감소를 초래하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 의식이 후퇴할 거라는 우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공존·상생, 연대·협력하는 생명 공동체의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지금 이 시대에 21세기 한국 사회의 한 중심축을 이루는 한국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역할과 사명이 막중하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빈곤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물론 빈곤의 원인은 개인적 책임에 기인할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잘못된 사회·경제적 체제의 구조적 모순, 곧 불공정한 분배와 착취 등에 우선적으로 기인하는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셨다(눅 6:20) 하여 가난 자체를 정당화한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가난이 불의한 사회구조의 악순환에 기인함을 인식하셨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풍성한 창조물을 누리도록 베푸셨지만, 가난의 현실은 소수가 그 창조물을 독점한 결과이다. 이에 하나님의 창조물을 과도하게 독점하는 것은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소수의 과잉 독점으로 인해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창조의 선물을 누리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은혜로부터 단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난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는 물론, 인간 사이의 단절을 초래한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눅 16:14-31)가 보여주듯이,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가난은 결국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단절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노동을 통해 창조세계를 책임적으로 관리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물질적 풍요에 빠진 부자들은 창조물을 나눔으로 창조세계를 관리해야 할 인간 본연의 책임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에 허덕이느라 자유롭고 주체적인 노동을 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부과된 책임을 감당할 경황이 없다. 이처럼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은 모두 그들에게 부여된 인간 본연의 책임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소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난의 현실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병들고 헐벗으며 굶주리며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예수께서는 병들고 굶주린 일반 백성을 단지 영적·정신적으로만 위로하지 않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들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셨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유념할 때 오늘날 사회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악화일로로 치닫는 시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처럼 가진 것을 서로 나눔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몸소 실천하는 일이다. 여기서 필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물질을 나눔은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공동체에 바쳐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공산주의적(共産主義的) 입장에서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소유를 똑같이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모든 사유재산의 몰수와 무산계급(無産階級)의 지배를 절대로 주장하지 않으셨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는 예수의 말씀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을 나눌 것을 요청함이다. 더 나아가 소수에게 독점된 부(富)가 사회에 골고루 환원되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생존권이 보장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할 것을 촉구함이다.
초대 기독교 역사가들이 증언하듯이, “삶과 죽음의 주이신 그리스도”(롬 14:9)를 신앙하는 초대 교인들은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던 도시에 남아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대다수 의사들이 환자들을 기피하고 방치함으로 말미암아 안락사(euthanasia)가 성행했던 상황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행동이었다. 또한 초대 교인들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당했던 고아와 과부들을 긍휼히 여기고 보살핌으로써, 당대의 비인간적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운 시대 정신을 주창하였다. 기독교의 발흥은 기존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는데, 특히 치명적 전염병이 발생한 결과 대다수 공동체들이 신뢰를 잃은 와중에 초대 교회는 오히려 급성장했고 이 새로운 공동체로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사상 초유의 팬데믹에 맞닥뜨려 정체성을 잃어가는 21세기 기독교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제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 공동체를 회복함으로써, 죽음의 기운이 횡행한 이 시대에 생명의 기운을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거의 무력해 보인 가공할만한 대재앙 앞에서 많은 이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몹시 난감해했지만, 그리스도인은 평안할 때만이 아닌 오히려 재난의 때에 더욱 의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필자가 역설하는 바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려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스스로 구제할 여력이 없는 사회적 소외자들이 다시 소생하기 위해선 누군가로부터의 건짐과 구원의 경험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희망의 끈을 절대 놓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생의 강력한 히든카드이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도움과 격려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누군가의 역할이 교회와 성도의 사려깊은 역할이기도 한데, 생명력을 잃어가는 사회구성원에게 삶과 죽음을 넘어선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vificans)을 전하는 것은 본래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4. 결어: 문명의 변곡점에 선 21세기 한국 기독교
지난 세 차례 산업혁명은 산업 분야를 위시하여 사회 문화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이행했고, 왕정 체제는 민주 체제로 바뀌었으며, 가족 공동체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모하였다. 더욱이 2016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촉발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대한 신학적 난제들을 던지고 있다. 지난 세 차례의 산업혁명이 사회 체제를 변화시켰다면, 4차 산업혁명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물론 인간성의 본질까지 재구성하려고 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현 시대의 기술 변화는 기계라는 단순한 도구의 수준을 넘어서서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해서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혁신 기술은 인간을 증강하고 변형시키고 재프로그램하고 재설계까지 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혼의 존재나 종교 체험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아예 인간 자신을 신격화하는 방식으로 종교성을 왜곡하기도 한다.
뼈아픈 통찰은 기독교 신학이 세 차례의 산업혁명 시대에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분적 실패를 경험했던 일이다. 그 결과 산업혁명이 진행될수록 사회 전반을 탈종교화(세속화) 시킴으로써,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도 약화시켰고 교인의 탈교회화 현상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세 차례의 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은 유럽과 달리 단기간에 동시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문명 전환기에 기술이 가져올 신학적·목회적 영향을 깊이 성찰할 여력이 여의치 않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한 작금의 현실에서도 한국 교계에는 기술에 대한 신학적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기술에 대한 공포(‘기술 디스토피아’) 또는 열광(‘기술 유토피아’)의 모순적 현상이 팽배함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기독교계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을 가질 만한 인프라가 이미 구축되어 있지만, 문제는 교회 교육과 신학 교육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혜안과 통찰력이 부족함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경계하고 회피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 4차 산업혁명과 그 핵심 기술인 AI에 대한 논의와 분석을 등한히 하고 있다.
올해 들어와 챗GPT 광풍이 불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챗GPT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이 강한 것 같다.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노력이 부족하니 모호한 경계심과 실용주의적 태도만이 커지는 형국이다. 출시 4개월 만에 몇 차례의 버전 업과 경쟁사들의 치열한 경쟁이 불꽃 튀는 현재로선 챗GPT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간이므로, 지나친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를 유보하고 AI 전반에 대한 더욱 심도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서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이 합세한 문명의 변곡점에서 시대의 변화에 다각도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한국 기독교의 책임적 자세가 매우 절실히 요청된다. 지난 2022년 2월 소천한 이어령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과학의 시대에 기독교는 왜 (소외되고) 쓸쓸해지는가?”라고 안타깝게 반문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과학과 오늘날의 문명을 품을 때 하나님의 목소리가 비로소 들리게 될 것이다”라고 권고하였다. 이 권고의 의미는 기독교가 문명의 변곡점에서 첨단 과학과 기술 문명에 등지고 복음을 전한다면, 새로운 시대에 복된 소식(the gospel)이 들리지 않게 될 거라는 경고성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은 혁명적 변화들이 수차례 일어났는데, 이 혁명적 변화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력은 항상 존재하였다. 기독교 교회는 보수적 반응을 보인 가장 대표적 집단 중 하나다. 그러나 결국 시간의 문제였을 뿐, 그 어떤 강한 반대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막지 못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새로운 변화가 낯설다고 해서, 또 여러 역기능이 우려된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한데, 왜냐하면 패러다임의 새로운 변화가 분출되어 일어나면, 아무리 반대해도 결국 일어날 변화는 반드시 일어나기에 이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배척한다고 해서 멈춰지지 않는다. 배척하면 할수록 기독교는 사회에서부터 점차 고립될 것이고, 사회를 향한 기독교의 영향력도 점차 감소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고, 한국 기독교가 이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 하면 못 할수록 사회로부터 점점 고립된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일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받아들이되 다가올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부응하는 교육 방법의 지평을 넓히는 변화, 일례로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와 ‘인공지능 리터러시’(AI Literacy) 같은 AI시대를 준비하는 교육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전문가는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팬데믹 이후 도래할 문명 전환기를 피할 수 없다면 그 거센 파도에 올라타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조언한다. 어떤 개인과 사회는 문명 전환기의 파도에 그냥 휩쓸려 가지만, 또 다른 개인과 사회는 변화의 파도 위에 올라타서 이를 위대한 기회로 삼기도 한다. 대전환을 기회로 만들기 위해선 적을 두려워하거나 맞서기보다, 오히려 이를 지혜롭게 선용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는 이 위기의 시간에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인류를 비인간화하여 우리 삶에 의미를 주는 전통적 가치를 위태롭게 할지, 아니면 공동운명체 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동의 윤리의식의 세계로 인류의 수준을 높이는 데 4차 산업혁명을 활용할 수 있을지는 공존·상생, 연대·협력하려는 우리 모두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기독교가 시대와 소통을 할 때에 계속해서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1세기 기독교는 AI를 위시하여 과학 기술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와 함께 호흡해 나가야 한다.
특별히 4차 산업혁명과 팬데믹 여파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막대한 규모로 인간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21세기 기독교가 위기에 잘 대처하려면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창 1:27) 존엄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을 체화하고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미래적 잠재성을 지니고 다른 유기체와는 구별된 특별한 존재로서 문화 위임을 수행할 책임적 존재이다. 하지만 AI가 인간보다 대부분의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일 경우, 인간이 하던 일의 상당수를 AI가 대체함으로써, 인간은 소위 ‘잉여 인간’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과학은 학문적 특성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논리적 주장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21세기 기독교계에서 적극적으로 다뤄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인간성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과제이며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인간성은 우리가 보호하고 지키려고 애써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끝>
※ 상기 본문은 지난 11월 10일 서울영동교회에서 있었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회에서 곽혜원 박사(21세기교회와신학포럼 대표)가 전한 강연 전문입니다. 지면 관계상 일부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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