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책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이민 1.5세 의사 이승복 박사가 쓴 책이다. 2005년 KBS TV 인간극장에서 다큐멘터리 5부작으로 그의 삶을 방영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갔다. 그리고 체조선수가 되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전미 올림픽 최고 상비군으로 인정받아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들과 웨스트포인트 군사학교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겠다는 애국심으로 미국 시민권마저 포기한다.
그런데 1987년 나이 열여덟 살 때 공중회전 연습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져 사지가 마비되고 말았다, 장밋빛 미래가 산산조각났다. 그러나 그는 최악의 절망 상태에서도 재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미국의 명문대학인 뉴욕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 다트머스 의대, 그리고 하버드 의대 인턴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최악의 절망 상태를 극복하고 인간 승리자가 된 비결은 믿음이었다. 재활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워드 러스크 박사를 만나 재활훈련에 구슬땀을 흘러 10년 만에 하버드 의대를 수석 졸업한 이승복(S.B.Lee), 영어 표기를 따라 ‘수퍼보이 리’(Super Boy Lee)라 불리는 사람이다. 기적 스토리다.
본문에도 운명을 바꾼 기적 이야기가 소개된다. 예수님이 행하신 세 번째 표적 이야기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인데 공관복음서에는 기사가 없다. 요한만 알고 있던 일이었을까? 예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다가 양들을 파는 장터,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이르셨을 때였다. 그 연못에는 환자들을 위해 다섯 개의 행각이 새워져 있다. 주석가인 W. 바클레이는 그 다섯 행각을 ‘모세오경을 의미하는 행각’으로 해석했다. 그 행각에는 병자들이 몰려와 병을 치료받고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따금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간헐 온천인데 사람들은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는 것이라며 그때 먼저 몸을 담그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중증 환자들, 그날도 별의별 병자들이 몰려와 온천수가 솟아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3절). 명절과 상관없는 사람들, 절기가 되어도 가족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들이다. 그중에 38년 된 중증 병자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는지 중도에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생을 불구자로 산 불운의 사람, 중풍병자로 보는 사람도 많다. 거의 전신마비였던 모양이다. 매일 연못가에 나와 먼저 연못에 들어가고 싶은 절박한 기대감으로 기다렸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운명이 바뀐다.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이름으로 생각하라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던진 질문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에게 묻는 질문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예수님의 눈에 띈 자에게 던진 질문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눈이 멈춘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 병자를 찾아주셨다. 믿음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간절히 찾은 것도 아니다. 일방적, 예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주시고, 일방적으로 고쳐주셨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특별한 은총, 일방적 은혜였다.
연못의 이름은 ‘베데스다’, ‘자비의 집’(The House of Mercy)이란 뜻이다. 폭이 50~67m, 길이가 96m, 네 귀퉁이와 중앙에 행각이 있었는데 실제로 베데스다 못은 많은 병자들로 인해 붐볐지만 자비나 긍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서로 먼저 고침받기 위해 살벌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자 이 연못이 이름값을 하게 된다. 베데스다가 진짜 ‘자비의 집’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눈에 띈 것이 기적의 주인공된 이유다. 이것도 일종의 선택인데 ‘선택은 은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도, 모세도, 그리고 다윗도 그랬지만 우리도 베데스다 같은 살벌한 세상에서 주님의 눈에 발견되고 선택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우리는 연못가에 누워 세상을 한탄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그 병자와 다를 바 없었다. 38년 된 그 병자를 보신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보고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하신 질문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였다.
소망의 불을 다시 일게 하는 질문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5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6절), 예수님의 발걸음이 멈춘 38년을 병치레한 사람, 그 병자는 ‘병이 오래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더 주님의 도우심이 절실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50세, 길어야 60세,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라면 평생을 병치레한 것 아닌가?
38년, 이스라엘이 광야를 방랑하던 햇수이기도 하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신2:14). 출애굽 이후 시내 산까지는 예정된 코스였지만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를 거부한 후 하나님의 진노로 광야를 방랑하다 다시 모압 광야를 통해서 가나안에 진입하기까지의 시간이 38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과 희망이 없는 무기력의 시간이었다. 38년 병치레,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한(恨)이 맺혔을까?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 그토록 긴 세월 동안 뭔들 해 보지 않았겠나? 하지만 다 헛수고였다. 일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남들처럼 희망을 갖고 베데스다 연못까지 오긴 했다. 그러나 기회가 없다. 만성고질병,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도와줄 사람도 없다. 성경에 보면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I have not a man), 도와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없다는 절망적 표현이다. “Helpless means hopeless.” 희망이 없다는 것, 절망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이 다가와 물으신 질문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였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 같지만 이는 오랜 세월 고생한 삶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한 질문이자 희망을 일깨워주는 질문이다. 38년이라는 세월이 낫기를 원하게 만든 게 아니고 낫기를 포기하게 만들었기에 인생을 체념하지 말고, 운명의 변화에 기대를 걸어보라는 것, 한때 강렬했던 그 소망의 불을 다시 붙여주시는 말씀이다. 다시 낫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하려고 하신 질문이다. 지난 38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했지만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 세상 사람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아도 예수님은 “내가 도와줄 테니 희망을 가지라”는 뜻, “나를 믿으라”는 뜻으로 물으셨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라. 그냥 “예”라고 하면 될 텐데 말이 길다. 지금까지 낫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구구한 변명이다. 3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나면서 낫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한 것 같다. 그래서 낫고 싶어도 틀렸다는 말이다. 포기하고 낙심한 사람,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원망만 가득하다. 38년이나 일어난 적 없는 이 사람에게는 당초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 게임이었다.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다리기는 해도 불편한 것에 익숙해 도전 의지가 없다.
『빙점』이란 소설로 유명한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병중에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했다. 그가 남긴 시(詩)를 보면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그의 안에 있던 강렬했던 소망의 불을 다시 일깨우셨다. 그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 기적이다. 병자에게 소망이 꿈틀거린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망의 불이 일어야 한다.
기적을 주시려는 질문
이 병자는 연못만 바라보며 실낱같은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신화는 신화일 뿐, 연못물이 동하는 신화는 진짜 희망도 아니다. 얼마나 희망을 주는 사람이 없고,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얼마나 해답이 보이지 않았으면 이렇게 헛된 희망을 품고 어리석게 살고 있을까?
그런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지금 곁에 서 계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치유될 수 있는 것, 주님은 그 자리에서 병자에게 명령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38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한 사람, 침상에 누워서 지낼 수밖에 없는 이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베데스다 이름 그대로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담긴 엄숙한 명령, 이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이 병자의 삶 속에 들어온다.
어떤 일이 일어났나?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절). 굳었던 다리가 힘을 얻고 움직인다. 38년 고질병이 단번에 나았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이다. “일어나라”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명령, ‘운명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명령은 순종할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이어서 “네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그 자리,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신다. 가라는 말은 “걸어가라”는 뜻, ‘돌아다니라’는 말씀이다. 38년이나 앓던 사람이 물리치료도 없이 자리를 들고 돌아다닌다. 세상에 이런 일이? 기적이다.
이 표적의 의미가 뭔가? 죄 짐을 지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의미 아닌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첫째, 예수님은 병들어 고통당하고, 아픔당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신 분이다. 세상의 다른 종교는 사람들이 신을 찾아가지만 예수님은 찾아온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찾아와 말씀하시는 분이다.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먼저 물으셨다. 셋째,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다. 아픔에 동참해주고,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미국의 유명한 카네기 홀을 만든 자선 사업가 카네기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원래 영국 출신,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방직공이었다. 카네기는 미국에 건너와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기관 조수도 하고, 전보 배달원도 하고, 전신 기사도 하고, 외판원도 했다. 어느 날 너무 피곤하고 지친 가운데 외판원 일을 하다가 한 사무실 앞에서 그림을 하나 보게 된다. 그 그림엔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배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림이다. 그 배 위엔 노가 걸쳐져 있다. 지금 항해할 수 없는 배다. 그런데 그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오리라!” 지금은 썰물 때라 배가 항해할 수 없지만 밀물이 들어오면 그 배는 보란 듯이 물 위에 뜰 것이라는 말이다. 카네기는 도전받고 용기를 얻었다. “내 인생에도 반드시 밀물 때가 있다. 번영의 때, 축복의 때가 있다.” 그래서 제철업을 하고 세계적인 사업가가 된다. 자기 재산으로 카네기홀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을 위한 자선사업을 한다.
그렇다. 소망의 불꽃이 꺼지면 인생은 끝이지만 그 불꽃이 일면 상황이 달라지고, 운명이 달라진다. 예수님이 밀물처럼 찾아오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신다. 우리는 이분께 구해야 한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신화적 세계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은 길에게 물어야 한다. 길 되신 예수님은 이제 성령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의 곁에 계신다. 마치 전파와 같다고 할까? 무수한 전파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무수한 전파의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수신기가 있어 주파수가 맞을 때 선명한 소리와 영상이 잡힌다. 주파수를 예수께 맞춰야 한다. 진리가 우리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우리는 모두 38년 된 병자 같은 영적 병자, 헛된 희망 속에서 산다. 무능력하고 존엄성을 잃어버렸다. 예수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바로 이런 상황의 역전이다. 자유를 얻자. 능력을 얻자. 존엄함을 얻자. 사람답게 살자. 운명의 노예가 아니라 운명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자. 그러라고 주님은 우리에게도 묻고 계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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