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가나에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다(54절). 34km 떨어진 가버나움으로부터 한 사람이 가나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부터 시작된 표적이다. 그는 ‘왕의 신하’였다(46절). 침례(세례) 요한을 참수시켜 죽게 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 그의 신하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가나까지 온 것이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대답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좀 쌀쌀맞고 생뚱맞다. 하지만 섭섭하지 않다. 체면을 구긴 건 맞지만 또 매달린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너무도 화급했기에 호반인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시라고 간청한다. 그의 수준에서는 최고의 신앙 자세, 결국 소원을 성취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예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하시자 이 신하가 그 말씀을 믿고 갔다는 것이다. 그 신하를 보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표적 신앙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위관리, 상류층 인사, 갈릴리 가버나움이라면 같은 동네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가 찾아온 거다. 별로 아쉬울 게 없던 사람이지만 아버지라고 하는 이름 때문에, 아들이 만난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한 죽음 앞에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0세밖에 안 된 일개 청년, 나사렛 목수의 아들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인데, 이건 신앙이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결단한 것이다.
소문 듣고 찾아왔다는 것도 대단하다. 자기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체면이고 지위고 그런 것 따질 때가 아니다. 한시가 급하다. 다른 방법이 없는데 뭔들 못하겠나? 그는 철저히 한계를 느꼈다.
예수님이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다.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기적과 관련한 요한복음서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병 고침이나 귀신을 내쫓는 치유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초월자, 권능이 많은 하나님의 아들로 부각시키는 분위기인데 요한복음은 기적을 기적이라 부르지도 않고, ‘표적’이라 부른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σημειον), 원래는 눈에 띄는 표시, 상징, 신호를 뜻하는 단어다. 그러니 기적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 다른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에서 기적은 예수님의 신성이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굳이 기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분이 아니다. 그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며 그저 혼인 잔치의 흥(興)을 살려준 분으로 보면 안 되고, 예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데 그쳐서도 안 된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구원의 실재’(reality)를 보여주며 예수님의 본질을 계시하셨다. 맹물같이 무미건조한 인생, 니고데모같이 맛 잃은 유대교, 사마리아 종교처럼 혼합주의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그런 세력들에게 참된 의미를 가져다준다. 그 참된 의미가 바로 ‘생명’, ‘생명’을 주는 것이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린 기적도 마찬가지다. 단지 기적 자체만 보면 안 된다. 다 죽게 된 사람을 살려주심으로써 당신이 모든 생명의 주인임을 밝히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 중 엄선해서 두 번째라고 번호를 매기며 이 기적을 복음서에 실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엇을 계시하기 원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적 자체에 매여서 기적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못하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면 되겠나? 오죽하면 예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고 비판하셨을까. 기적에만 매몰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앞부분인 ‘표적의 책’ 결론을 보면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12:37). 사람들이 기적에 매몰되어 정작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에 그 믿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표적을 찾기 때문이다. 아니 유대인들이 기적을 찾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적이 그때뿐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더 센 기적을 요구한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그랬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처음에는 너무 신기해했다. 먹을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에 감격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시했고 더 자극적인 것을 요구했다. 그게 바로 보는 것에 매인 신앙, 표적 신앙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일상화된 것들이 이전에는 다 기적 아니었나? 비행기, 자동차, 핸드폰, 인터넷 등이 다 기적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것을 더이상 기적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기적 신앙은 보이는 것만 신봉한다. 보이지 않아도 중요한 것들이 많지만 결과가 보여야 믿는다. 하지만 만일 보이는 것만 신뢰한다면 이 소중한 것들과 우리는 상관이 없어지지 않나? 어떻게 믿고, 어떻게 이런 것에 우리 인생을 걸겠나?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기적으로 자신을 증명하셔야 하나? 꼭 그래야 한다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계셨고 팔레스틴 땅에 계셨는데 그 이후의 사람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나?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을 요구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0:29). 보지 않고 믿는 우리를 복 되다고 하신다.
말씀에 근거한 신앙
이 표적 이야기의 특이점이 있다. ‘말씀’이 능력임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절). 34km나 되는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길이 멀고 귀찮아서 말씀만 하셨겠나? 아니다. 가다가 아이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셨겠나? 그것도 아니다. 말씀만으로도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시려는 것, 보지 않고도 믿고 순종하면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기적이었다.
그런데 왕의 신하의 반응이 놀랍다. 자기 생각과 달랐지만 예상외의 대답에 순종한다. 왕의 신하여서 “같이 가자”하면 갈 줄 알았으나 말씀을 믿고 간 거다. 두말하지 않았다. 의문도 섭섭함 표출도 하지 않았다. 선 순종, 후 체험! 이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잘한 일이지만 단 한마디의 말씀을 믿고 돌아간 것은 정말 대단하다. 놀라운 것은 고침받은 시간이 ‘어제 7시’면 오후 1시인데 다음날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다른 볼일 다 보고 간 셈이다. 믿어도 너무 믿은 것, 엄청난 영적 발돋움(reaching out)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본문에서 ‘살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50, 51, 53절). 말씀의 능력이다. 그렇다. 예수 안에 생명 있다. 두 번째 표적이야기는 믿으면 치유뿐만 아니라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하는 우리, 말씀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말씀을 통한 기적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요한이 복음서를 시작할 때 태초에 계셨다는 말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왕의 신하처럼 철저히 말씀에 근거한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절대 신앙
남 얘기로 여기면 안 된다. 과거의 한 사건으로 여기기만 해도 안 된다. 예수님이 함께 가서 직접 고쳐주시지 않고 말씀 한마디만 하셨는데 왕의 신하가 그 말씀을 안고 간 것처럼 절대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가면서 아마 연신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랬을 거다. 능력의 말씀이 그 인격을 노크하는 순간 믿음이 생긴 거다. 마음이 흥분되고 확신이 생겼다. 그에게는 불안한 구석이 없었을까? “정말 말씀대로 살아날까? 이대로 그냥 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억지로 예수님을 끌고라도 왔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별생각 다 했을 거다. 이게 바로 우리의 실존, 신앙인들의 모습이다.
냉탕 온탕을 오갔다고 할까? 그러면서 집으로 오는데 얼마나 가까이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집 하인들을 만난다. 그들도 좋은 소식을 빨리 알리고자 가나 쪽으로 오고 있었던 거다. “살아났습니다.” 하인들이 소리쳤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낫기 시작한 시각을 물으니 어제 일곱 시,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다. 그 시간에 아들이 살아났다. 너무 감사해서 온 집안이 다 믿었다(53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
그런데 어제 이미 아들은 살아났지만 신하는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하루 종일 불안과 초조함으로 지냈을 수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절대 신앙이었다면 공포의 하루는 없었겠지만 어디 절대 신앙이 쉽나? 쉽지 않더라도 우리도 절대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막벨라 굴이라는 작은 땅만 소유하였지만 이를 통해 장차 올 큰 민족과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을 겪고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절대 신앙만 갖게 된다면 당장 기대에 대한 결과가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신하가 말씀에 대한 절대 신앙이 아니었다면 기적이 일어났을까? 말씀이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기에 예수님은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나를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믿어야 기적이 있기 때문이다.
왕의 신하가 절대 신앙으로 ‘믿고 가는 신앙’을 보인 것은 몇가지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감각적 한계 극복이다. 소문만 듣고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면 믿을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자세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공간적 한계 극복이다. 예수님의 원격 조정(remote control)을 신뢰한 것이다. 셋째는 시간적 한계 극복이다. 조급한 자신에 비해 예수님이 너무 느긋하셨지만 “아들이 나았다”는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넷째는 경험적 한계 극복이다. 경험 고집이 아니었다. 고정관념도 아니었다. 마치 눈물로 기도하던 한나가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받고 “가서 먹고 다시는 얼굴에 수색이 없느니라”(삼상1:18), 그런 모습 같다. 맹목적인 신앙을 갖자는 말이 아니다. 되지도 않을 기적을 바라며 매달리자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응답하실 것을 믿자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들자면 인격적 한계 극복이다. 사회적 지위(social position) 운운했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적이었다. 또 “즉시 가 달라”, 부탁조였지만 명령이었는데 젊은 예수님이 “가라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신다. 젊은 예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거기서 만일 자기 처지, 자기 경험, 자기 신분 따졌다면 어땠을까? 순종이 기적을 낳은 거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살 난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회당장은 예수님 앞에 가서 발아래 엎드려 간청한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어 구원받아 살게 하소서”(막5:23). 그때는 예수님이 가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과 일행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는데 노상에서 야이로의 집에서 온 하인을 만난다. 그 하인의 말은 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막5:35). 이제 상황 끝났으니 가고 오고 할 것 없다는 뜻이다. 맞다. 예수님이 그저 의사시라면 끝난 게 맞다. 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한다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외동딸의 죽음에 회당장은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겠지만 예수님은 믿음을 주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막5:36).
야이로는 말없이 순종하고 따라간다. 사람들이 울며 통곡한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며 아람어로 ‘달리다 굼’(Ταλιθα κουμ)을 외치셨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내게 네게 말하노리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5:41), 딸이 다시 살아났다. 주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순종한 것이 기적을 낳은 거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할 때도 그랬다. 그들은 홍해를 직면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따라오고 앞에는 홍해가 있다. 독 안에 든 쥐 꼴, 꼼짝없이 60만 명이 죽게 생겼다. 그때 하나님 앞에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지팡이로 홍해를 치고 건너가라.” 전설에 보면 이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쳤는데 안 갈라졌단다. 그래서 모세가 당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청년 여호수아가 “방금 홍해를 치고 건너가라 하셨는데 왜 서 계십니까?” 그래서 물속에 뛰어들었더니 쫙 갈라지더란다. 전설이기는 해도 은혜 되지 않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부모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이 선언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의 가정에 빛나는 미래의 축복이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이 약속은 오늘 우리나라 교회를 향한 새 비전이 실려 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야기된 3고 현상으로 힘들게 사는 모든 이들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자.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절대 신앙이어야 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 얻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풍성한 삶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아닌가? 절대 신앙으로 더 풍성한 은혜를 누려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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