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 사회적으로 지금처럼 한국 음악계에서 국제 콩쿠르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 혜성처럼 등장해 콩쿠르에 입상하여,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피아니스트가 있다.
뉴 잉글랜드 음악원과 대구 가톨릭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있는 피아니스트 백혜선 교수는 1989년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2위와 199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3위에 입상하며 국제 및 국내 음악계에 알려지며 인지도를 쌓았고, 1997년 20대 후반의 나이로 서울대 기악과에 조교수로 임용됐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얻은 성공과 그 후의 좌절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연들에 대해 최근 백 교수가 CBS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를 통해 간증을 전했다.
백혜선 교수의 신앙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백 교수는 “어머니는 언제 주무시는지 모르게 늘 기도를 하셨다. 어머니 옆에서 자면, 밤에도 주무시지 않고 계속 기도하셨었다”고 했다. 그녀는 중학생 때부터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갔고, 대학시절은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 오랜 타지 생활에서 힘들 때마다. 어머니께 얘기하면 “너를 위해서 기도하겠다”라는 대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또 한 명의 신앙의 선배를 소개했다. 백 교수는 십대 시절 부모가 운영하던 병원에서 근무하셨던 “나이가 꽤 들으셔서 내가 ‘아줌마’로 불렀던 한 조리사”에 대해 “양친이 모두 의사이셨기에 많이 바쁘셨다. 그래서 나에게 어머니 겸, 할머니 겸, 친구 겸, 이모 겸 하셨던 분이다. 그 분이 아침마다 나를 보면 머리에 손을 얹고 ‘우리 혜선이가 하나님 위해 큰 일을 하게 해주세요’라고 축복기도를 하셨다”고 했다.
백 교수는 그분에 대해 “밥을 할 때 빼고는 병원의 다락방에서 늘 기도하셨다.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도 많이 기도하셨던 분이다. 결국 우리 어머니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분이자, 우리 집의 기도의 원천이셨다”며 “나에게 너무 많은 축복을 주셨던 분이다. 항상 나에게 모든 일을 할 때 기도로서 하라고 권면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20대 초반, 백 교수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준비하는 가운데 우연히 본 잡지에서 본 한 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보았다. 2명의 장애아이들을 키우는 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백 교수는 그 가정의 이야기를 보며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며 그녀는 기도하는 가운데 “만약에 이 콩쿠르를 나가 어떤 상금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것을 이 가정을 위해 쓰겠다”고 내뱉었다.
백혜선 교수는 “콩쿠르를 준비하는 가운데, 매일 매일 기도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피아노 잘 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든 이 가정과 연결이 되어서 그 장애아이들과 어머니를 보고싶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어 “그런데 1등이 됐다. 나는 거기서 기도의 힘을 느꼈다”며 “그런데, 그 과정도 참 웃겼다”고 말했다.
그녀는 당시 콩쿠르에서 연주를 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다음 악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까먹어서 머리가 하얗게 된 그 상황에 갑자기 연주하던 피아노 줄이 끊어졌다. 그래서 연주가 중단된 후에 백 교수는 다시 연주할 수 있었다. 백 교수는 “콩쿠르에서는 사실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고 말하며 “이것은 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웃으며 설명했다.
입상 이후,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어떤 것도 어겨서는 안 된다”고 했고, 그래서 결국 그 장애 가정을 찾아 94년 당시 2만 달러 상당의 상금을 전달했다. 그 후로 어머니는 그 가정을 지속적으로 돌봤다고 한다. 당시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어린 장애아이는 커서 “피아노 선생이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콩쿠르 이후 서울대 최연소로 서울대 기악과의 조교수가 된 백혜선은 승승장구 했지만, 그 이후 오랜 광야의 시간을 걷게 된다. 10년간의 서울대 생활에서 당시 음대의 권위주의적 문화와 너무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며 힘든 시간을 겪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소모적인 부분이있다. 그렇기에 나를 채워넣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 당시에는 잘 안됐다. 피아니스트로 배워야 하는데 ‘뭔가, 모자르다’고 느끼며 항상 불안해 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최연소로 서울대에 임용이 됐지만, 그녀는 미국으로가서 피아니스트로 더욱 성장하길 원했고, 2명의 아이를 키우던 남편과는 “부부는 한 곳을 바라봐야 하는데 남편과는 보는 곳이 달랐다”라며 남편과 이혼을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더불어 서울대 교수를 그만 두고 미국행을 택한 그녀는 그 당시에 대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자만했다. 그 당시 나는 국내에서 탑급의 연주자였다. 아무리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라며, 뉴욕 보스턴으로 향하게 됐다.
두 아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비싼 뉴욕 맨해튼의 한 중간에 거주했던 그녀는, 자녀들을 비싼 유아원에 보내기도 했고, 부동산 재태크에 이른 나이에 눈을 떴기에 뉴욕에 3채의 고급아파트를 소유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잘 살았던 그녀는 2008년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집값은 폭락하고 이자는 급등하여 이후로 모든 것을 잃게 됐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무릎 꿇고 기도해야 했다. 주님을 정말 만난 것은 그때 였다. 내가 승승장구 했을 때는 절대로 주님을 안 찾았다. 서울대를 그만 둔 것도 다 내가 알아서 했고, 뉴욕에서 재태크를 하며 살려고 했던 것도 내 마음이었다”고 했다.
40일 작정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대구 카톨릭대학에서 석좌교수로 제안을 받았다. 이것을 응답으로 받으며 백 교수는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는 성취하는 것도,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살게 됐다. 무조건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야의 삶이 시작됐었다”라고 했다.
이어 “그 후에 깨달은 것은 내가 서울대를 보내주신 것에도 나는 감사하지 않은 것이다. 내 삶의 실패가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 지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삶 속에서는 어떤 선택에든 대가가 따르는 것 같다. 나는 주님께 여쭤보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고, 내 마음대로 다 선택했다”며 “그러면서도 교회는 열심해 다녔다. 그런데 겉으로 다녔던 것이다. 그때부터 주님이 제 삶을 만지기 시작했는데, 정말 엄청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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