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선교사들과의 사귐
우남은 배재에 입학한 이후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많은 선교사들과 사귐을 갖게 되었다. 배재학당장인 아펜젤러 선교사를 비롯하여 이승만에게 한국어를 배운 미 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 파이팅, 삼문 출판사 사장을 지낸 올링거, 배재학당교사인 노블, 육영공원이사이며 배재학당 3대 교장을 지낸 벙커, 육영공원 이사이며 YMCA 초대회장인 헐벗, 배재학당 임시당장을 지내고 제물포지방 감리사를 지낸 존스, 그리고 상동병원의 설립자이자 상동교회의 목사인 스크랜턴과 배재학당 YMCA를 조직하고 황성 YMCA 초대회장을 지낸 질렛 등과 같은 감리교회의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예수교 학당과 새문안교회를 창립하고 기독교 청년회를 조직한 언더우드, 제중원 원장을 지내며 고종의 시의(侍醫) 애비슨, 연동교회의 목사이며 황성 YMCA 창립위원인 게일, 목포의 영흥학교 교장을 지낸 프레스톤과 같은 장로교회 선교사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우남이 배재학당을 졸업할 무렵, 이미 그의 탁월한 재능을 높이 사고, 그가 장차 한국의 정치 개혁과 기독교 전도 사업에서 발군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나머지 그의 개인적 행보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1985년 을미개혁 때에 우남의 상투를 잘라 주었으며 또 1898년 말, 박영효 추대 음모사건이 실패하자 우남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던 제중원(濟衆院) 원장, 애비슨은 1950년대에 집필한 그의 재한 회고록에서 이승만이 배재학당 재학시절, 주일마다 자기 집에 방문하여 영어 회화를 익히면서 자기와 조선왕조의 절대군주제를 혁파할 필요가 있다는 반역적 토론을 벌였다고 회고하면서 아래와 같이 청년 이승만의 이상과 태도를 논평하였다. “이승만이야 말로 과거에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이 배출한〔세계적인〕위인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다른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우남에 대해 이와 비슷한 평가를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 점은 1904년 우남이 유학을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 6명의 선교사들이 우남의 유학을 위해서 추천서 19통을 써 주었던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언더우드의 목사의 추천서를 살펴보면, 언더우드는 뉴욕에 있는 자기 형(John T. Underwood)과 워싱톤에 있는 친지들에게 우남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교도(異敎徒)들에게 무엇을 해 할 수 있는 지를 증명해 준 빼어난 모범’ 이라고 칭찬하였다. 프레스톤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그의 친구에게 쓴 추천서에서 우남은 ‘수년 간의 신앙 경력이 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이 나라 최고의 애국자의 한 사람이며 ... 최상급의 신사라고 추켜세웠다.’ 유영익 박사는 자신의 글에서 옥에 갇혀 있는 우남을 도운 선교사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선교사들은 정치개혁가 내지 기독교 토착 지도자로서의 이승만의 잠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이승만에게 여러모로 애호의 손길을 뻗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이승만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에비슨은 이승만이 투옥된 직후 그의 요청에 따라 영문 신약성서와 영어사전을 입수하여 감옥 안에 차입해 주었다. 언더우드, 벙커, 게일등 선교사들은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한성 감옥에 드나들면서 이승만이 조직한 성경반과 옥중학당을 인도, 격려해 주었다.
한국에 건너오기 전에 상해에서 활동했던 벙커는 광학회(廣學會)에서 출판된 기독교 및 제도개혁에 관련된 각종 책자들을 모아 차입함으로서 이승만이 옥중 서적실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직책상 혹은 거리 관계로 이승만을 자주 심방 할 수 없었던 아펜젤러, 애비슨, 그리고 존스등은 이승만에게 편지, 선물 혹은 의약품을 차입하면서 애틋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서재필까지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들 여러 선교사들 가운데 배재학당의 당장인 아펜젤러는 가족의 생계까지 돌보아 주었는데 이 사실은 이승만이 1899년 12월 12월 28일에 그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서양력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느 날이 성탄절인지 기억 할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귀한 선물대신 새해 인사까지 겸한 성탄절 선물로 여기고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행복, 강녕,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저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 등을 보내 주신 데 대하여 어떤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 많은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 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제 부친께서 편지로 선생님의 크신 도움에 감사 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저희 집이 아주 곤경에 처한 시기였습니다. 황량한 겨울이기 때문에 이곳 어둡고 축축한 감방은 요즘 너무나 춥습니다.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의복과 음식, 그 외에 모든 것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선생님의 자비로 저는 지금 옷이 충분하며 그래서 추위가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다시 한 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차후에 다시 글을 올릴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그치겠습니다." (1899년 12월 28일 이승만)
우남이 한성 감옥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남의 석방을 위해서 우남 자신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애를 쓴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우남과 친분 있게 지냈던 선교사들 다섯 분이 연명으로 1901년 11월 9일 대한제국 내부협판 이봉래(李鳳來)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이는 그들이 얼마나 우남을 아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펜젤러 애비슨, 벙커, 헐벗 및 게일 선교사는 당시 궁중에 영향력이 컸던 이봉래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보내면서 고종황제로 하여금 지난겨울에 약속한 대로 이승만에게 특사를 베풀도록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귀하의 관심을 끌어야만 하는 급한 용건이 있어 저희들이 각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약 3년 전에 이승만은 한국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왕진(往診) 길에 나섰던 미국인 의사 셔만 박사를 도우려고 동행하던 중〔병졸에게〕체포되어 한성 감옥에 구속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재판을 받고 처음에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나중에 형량이 10년으로 줄었습니다. 체포되었을 당시 이승만은 인술을 베풀려는 미국인 의사와 동행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의 사안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지난겨울에 언더우드 박사의 진지한 노력의 결과로 황제 폐하께서는 이승만을 가장 가까운 기회에 사면, 석방하겠노라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폐하께서 약속하신 커다란 자비와 선심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또한 각하〔이봉래〕께서 이 은전의 소식을 우리에게 전달했던 사실을 기쁘게 흡족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각하께서 이 불행한 청년에게 친절한 관심을 베풀어 주신 점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이 아름다운 나라에 잠시 살고 있는 다른 외국인들 모두와 더불어 존귀하신 황제폐하의 50주년 탄신일을 맞아 한국의 모든 충성스러운 백성들과 함께 축하를 했습니다. 신하들 간에 자비롭다고 소문난 폐하께서는 이날 일정 범주의 죄수들을 전부 사면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반 특사에 이승만과 같은 죄수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폐하의 탄신을 기리는 이러한 성대한 행사의 와중에 제국 정부의 모든 관리들이 여러 가지 중대한 업무로 인하여 혹시나 황제께서 전번에 우리 친구 언더우드 박사에게 약속하셨고 또 각하께서 우리에게 직접 전언(傳言)하셨던 사면, 석방의 명령을 제대로 신속하게 이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히 이 문제에 대해 각하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대담하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각하께서는 황제폐하께서 언더우드 박사에게 약속하신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자세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방도가 없는 우리로서는 이렇게 각하에게 직소(直訴)함으로서 황제께서 너그럽게 베푸시려는 사면, 석방의 명령이 정부 당국자에게 올바로 전달되어 감옥에 갇힌 죄수가 그 특혜를 조속히 받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다시 한 번 각하의 시간을 빼앗은 데 대하여 관서(寬恕)를 빕니다. 이 기회에 각하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 (아펜젤러, 애비슨, 벙커, 헐벗, 및 게일 배상(拜上))
이 진정서의 내용을 당시 국내의 정치상황에 결부시켜 음미해 보면 1900년 말 고종은 이봉래를 통해서 언더우드에게 이승만을 가장 가까운 기회에 석방시켜 주겠노라고 약속한 사실이 있는데, 1901년 9월 7일 고종의 탄신기념일 (만수절: 萬壽節)을 맞아 고종이 ‘6범 내외(內外)를 무론(無論) 하고 정적(情跡)을 참구(參究)하여 방석(放釋)할만한 자(者)는 방석하고 감등(減等)할만한 자는 감등하라’는 조칙을 내렸건만, 이 조칙이 공포된 지 두 달이 지난 11월 초까지 이승만의 석방에 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가를 따지면서, 결론적으로 1년 전 고종이 언더우드에게 전달했던 장본인인 이봉래가 책임지고 고종에게 여쭈어 고종으로 하여금 그 약속을 이행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이 1901년 11월에 선교사들은 정부 내지 궁정의 유력한 관리를 움직여 이승만의 조기석방을 실현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노력은 무산되었다. 흥미롭게도 우남은 옥중에서 선교사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p.56.
우남의 사교술은 뛰어났다고 이미 언급하였거니와 이처럼 우남의 석방을 위해서 여러 선교사들이 애쓰고 있다는 사실만 본다 하더라도 우남이 평소에 그들과 얼마나 가깝게, 친화력 있게 지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하여 주는 대목이다. 우남의 이와 같은 사교능력, 친화력은 후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또한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조국에 들어와서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계속>
※일부 각주는 지면상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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