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남의 단발(短髮)
기독교 선교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한 우남은 우선 단발을 결행하고 비록 내키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매일아침 기독교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말기인 당시에 시대적 환경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터럭을 자른다는 것은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단발령이 내려지기 이전 명과 조선은 모두 성리학적 기준에 따른 생활을 했고, 생활의 기본 지침서로 <효경>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효경>의 처음에 보면 '수지부모(受之父母)는 신체발부(身體髮膚)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구절이 있다. 즉, 내 몸과 피부와 머리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헐어 상(傷)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명과 조선인들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머리털을 산발하는 것은 짐승의 도리이고, 머리털을 묶어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머리털을 함부로 자르는 일이 없었으며, 빠진 머리털을 아침마다 모아 1년의 마지막 날에 태우는 것을 보통으로 삼았다. 이는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태어난 지 100일이 되는 아이는 이마의 앞부분 머리를 잘랐는데, 이는 눈을 찌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고, 이후 머리를 길러 댕기를 땋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 아이의 경우에는 남은 머리를 두 조각으로 갈라 양쪽으로 댕기를 늘인 후 다시 하나로 합쳐 내렸고, 이를 '각'이라고 부르며, 여자아이는 남은 머리를 네 조각으로 갈라 각각 묶은 후 하나의 댕기로 만드는데, 이를 '기'라 하였다. 태어나 100일에 자른 베넷머리는 장가갈 때나 시집갈 때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나 중국인이나 자란 후 머리를 자르는 일을 대단한 치욕으로 여겼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5년 을미사변 후 있었던 을미개혁에서 단발령이 선포되자, 유림을 중심으로 하여 '차두가단 차발불가단(此頭可斷 此髮不可斷) 즉, '이 머리는 잘라도 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는 사상이 팽배했던 것이다. 나중에 대마도로 끌려가 스스로 단식하다 순국(殉國)한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이 그 대표자이다. 머리털을 자르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남의 삶에 있어서도 단발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삶을 단절하는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과거와의 단절이란 어머니의 종교인 불교와의 단절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남은 상투를 자른 후에는 얼마 동안 어머니 곁에 가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단발한 것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정부에서 1895년 단발령을 내렸을 때 나는 자의로 단발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아침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머리를 자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내말을 믿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풍습은 선조의 제단에 제사를 드리면서 단발을 하는 것은 고래의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나 세조(世潮)의 흐름에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아뢰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그 당시 나는 제중원에서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낡은 진료소에서 에비슨 의사가 가위로 나의 머리를 잘라버렸다."(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p. 308.)
서구 문명을 수용함으로써 이승만에게 일어난 획기적인 변화는 그가 상투를 자른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승만은 왕이 단발한 직후의 어느 일요일 오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상투를 잘라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Oliver R. Avison, Memories of Life in Korea, p83-84.).
당시 조선은 상투의 나라로 불리어질 정도로 상투가 갖는 그 의미가 각별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가(L. H. Underwood) 한국에 대해 저술한 자신의 책 제목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 life in Korea. 상투쟁이들 사이에서 산, 15년』이라고 한 대목에서도 당시 조선에서 상투가 갖는 의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시에 상투는 크게 3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째는 효(孝)를 상징했고, 둘째는 성인 남성을 상징했으며, 셋째는 신분을 상징했다. 상투의 역사는 고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적 뿌리가 깊었고, 그 풍습 역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1895년 12월 30일 을미개혁이 공포되면서 정부는 단발령을 포고한 것이다.
단발령의 목적이 위생과 편리함, 그리고 정치 개혁과 민국부강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상투를 자른다는 것을 매우 불경스럽게 여겼던 조선의 백성들이 단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까지 가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그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단발령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대다수의 백성들은 단발령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서양문명을 수용하려는 사람들과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단발령에 참여하려고 했다. 우남의 경우도 여기에 속했다. 우남은 단발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각오를 『제국신문』 논설에「단발 결실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우남은 이 논설에서 단발을 작정한 백성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던 털을 버렸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힘써야 할 일을 만난다면 이에도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겉모습을 외국인과 같이 바꾸었으므로 우리의 속마음도 새롭게 가다듬어 외국인에게 지지 말고 그들처럼 부강, 문명에 나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우남의 머리를 잘라 주었던 에비슨도 그의 단발 결심이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그저 재미삼아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진료실로 데리고 가 상투를 잘라 주었다. 당시 우남은 에비슨을 내 친구라고 언급할 만큼 에비슨과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우남이 단발 할 당시 제중원(濟衆院)에서 근무하는 미국 장로교 여성 의료 선교사 회이팅과 제이콥슨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월 20달라를 받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에 드나 들면서 에비슨을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가까운 사이었다. 에비슨이 그의 상투를 자르자 우남은 잘린 상투를 집어 거즈 조각에 싸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자신에게 상투를 틀어준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상투를 자른 후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배재학당에 입학했을 때에도 입학 사실을 어머니에게 숨겼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안 뒤에는 자신은 기독교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로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그가 서양 문물 뿐 아니라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그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서양문명과 선교사들에게 다가 갈수록 어머니가 원하는 방향과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남에게 상투의 단발은 부모가 그토록 쌓아 올려준 낡은 인생관을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인생으로 들어가는 엄숙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상투를 자른 우남은 배재학당 학생 중에서 최초의 단발자가 되었고 이로써 개화의 선두를 달리는 청년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계속>
※지면 사정 상 일부 각주는 생략합니다.
cf. 에비슨은 1860년 6월 30일에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1866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1879년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1884년에는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를 졸업 후에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1884년 빅토리아 대학교(졸업할 때는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하여 1887년 6월에 졸업하였다. 의과대학 재학 중인 1885년 7월 제니 반스와 결혼하였다.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으며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로도 활약하였다. 1892년 9월 선교 모임에서 만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영어: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어: 원두우, 한자: 元杜尤, 1859년 ~ 1916년)로부터 해외 선교의 제안을 받자 교수직을 사임하고 1893년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1893년 6월 가족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부산을 거쳐 8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제중원 원장으로 부임한 에비슨은 1894년 제중원의 운영을 두고 조선 정부와 6개월간 협상을 벌여 9월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 받았다. 1904년 9월 제중원을 새로 신축하였고 기부금을 낸 미국인 사업가 루이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년 ~ 1913년)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기념 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으로 이름 변경하였다. 제중원 의학교는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로 불리게 된다. 1908년 6월 에비슨에 의해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인 첫 졸업생 7명이 배출된다. 세브란스 의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명칭을 변경하며 발전한다. 1915년 조선기독교학교(Chosun Christian College)가 언더우드에 의해 개교하자 에비슨은 부교장에 임명되었고 1916년 교장인 언더우드가 사망하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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