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회장 김성운 박사)가 지난 25일 오전 충현교회(담임 한규삼 목사) 1층 베다니홀에서 제118차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하광민 박사(총신대)는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의 북한 선교’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하광민 박사는 “김창인과 북한선교는 남북분단 이후 한국교회의 북한선교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과 사건이었다”며 “김창인 목사가 일으킨 북한선교운동은 잠자는 한국교회의 북한을 향한 선교적 본성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이어 “한국 전쟁 전후 북에서 내려온 월남 그리스도인들은 1950년부터 1970년대에 한국교회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한국교회로 재정착하였으며, 한국교회의 성장을 견인하는 추동체가 되었다”며 “이들 한국교회는 주일학교를 비롯한 모든 세대의 부흥을 맛보게 되었다. 또한 세계선교를 시작하는 발판도 마련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북한선교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북한정권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더 나아가 당시 북한과 대결점에 서 있던 남한정부의 반공정책으로 인해 북한을 향한 선교적 접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며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월남민이 중심이 된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을 마귀로 규정하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창인 목사도 마찬가지로 공산당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 박사는 “김창인 목사의 북한선교는 성경적 관점에서 나온 복음전파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는 처음부터 선교를 강조하는 목회자였다”며 “충현교회에서 선교위원회가 발족한 시기는 1964년 10월 11일 주일에 대만선교를 위한 특별헌금을 하게 된 것이 해외복음선교회의 출범의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1967년 10월 여전도회 부서 조직 내에 선교부가 신설되게 되었고, 1968년에는 청년부 면려회에서 선교부를 신설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던 중 1968년 11월에 드디어 ‘해외복음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다. 김창인 목사의 복음사랑은 교회 내에서 선교사역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충현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거듭나게 만들었다”며 “충현교회는 1975년 1월부터 선교주일을 제정하고 제1회 선교주일을 맞아하였다. 선교주일이 제정된 것을 계기로 1975년에는 선교사 양성, 선교사업지원, 선교학 연구 등의 목적을 가지고 선교사가 되고자 하거나 선교사업에 헌신봉사하려는 사람, 선교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 선교적 사명을 띄고 외국에 나갈 사람들을 대상으로 ‘땅끝까지회’가 조직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김창인 목사가 세계선교에 열심을 내었지만 아직까지는 북한선교를 시작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해외선교로의 열정과 헌신은 마침내 북한선교로 확장되게 되었다”며 “또한 해외복음선교회의 조직운영과 훈련 프로그램들은 후에 북한선교회를 운영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김창인 목사는 세계선교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선교도 품게 되었다”며 “1971년부터 아세아복음선교회 임원이었던 김창인, 정석홍 목사와 백인빈 장로는 대공선교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활동하였다”고 했다.
이어 “1974년 일본에서 개최된 제 4차 동남아 선교대회에 참석할 당시 미국과 유럽 및 중립국 여러 나라 선교사들로 구성된 대공 지하선교단체를 통해 외항선을 통한 북한선교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단체들과 유대를 맺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국제적인 대공선교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현장에서 급히 ‘씨앗선교회’ 를 발기하였다”며 “그 이후 1977년 4월 1일 ‘북한선교회’ 를 설립하고 김창인 목사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그해 4월 29일 ‘씨앗선교회’를 해체하고 충현교회에서 ‘북한선교회’ 창립기념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드디어 북한선교를 공식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설립된 북한선교회는 8가지의 목적을 지니게 되었는데, 첫째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적 반도덕적 사상을 배격하고 북한공산치하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동족에게 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여 인류의 자유와 평화의 구현에 적극 기여하는 것이며, 둘째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의 자유 애호 국가에 대한 무력 침략과 파괴, 음모를 규탄하며 기만전술 등 여하한 유혹에 대하여도 선량한 국민이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계몽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셋째로 국내의 복음 선교 및 대공 지하 선교활동, 넷째로 기독 정신의 연구와 생활화, 다섯째로 기독교인의 방향제시, 여섯째로 사회봉사 활동, 일곱째로 국제기독실업인간의 유대와 연합사업활동, 마지막 여덟째는 귀순용사 선교”라고 했다.
하 박사는 “북한선교회가 처음에는 초교파적으로 조직되었으나 결국 김창인 목사와 충현교회의 일이 되었다. 북한선교회가 77년에 설립되었지만 충현교회 내의 조직으로 신설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며 “충현교회 내에서는 1983년 ‘충현세계선교회’(전신 해외복음선교회) 산하 ‘북한선교특공대’로 조직되어 사령관 김창인 목사, 지도 조준상 목사, 부지도 김오용 목사가 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북한선교회가 충현교회 내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사역의 내용과 범위는 충현교회의 부서 사역으로 머물지 않았다”며 “김창인 목사는 북한선교를 그의 사명으로 받았고, 훗날에 충현교회의 5대 사명중에 가장 앞장선 사명으로 선포할 정도로 큰 비중을 두었다”고 했다.
그는 “김창인 목사가 살아왔던 시대는 한국사의 격동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국의 북반부에서 태어나 가장 일제치하였지만, 한국교회의 부흥을 맛보았다”며 “신사참배거부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냈다. 공산주의자들과 맞서면서까지 신앙과 교회를 지켰다. 월남한 이후 서울과 부산에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력을 다했던 한 목회자였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김창인 목사를 들어 사용하셔서 잠자고 있던 한국교회를 깨우셨다”며 “신사참배에 대항하던 순결성에 기반하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마음과, 북한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합쳐져서 북한선교를 외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많은 조력자들이 함께 하였다”고 했다.
특히 “충현교회 성도들, 그 중에서도 함께 내려온 월남민 성도들이 가장 큰 마음을 나누는 이들이 되었다. 그들은 현재와 미래의 북한교회를 세우기 위해 충현교회를 세웠고, 언젠가는 북녘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 있으리라 다짐했다”며 “한국교회 역시 그와 함께 하였다. 수 많은 신학생, 목회자들이 그의 시대적 메시지에 반응했다. 북녘을 향한 선교에 한국교회가 동참했고, 인적·물적 동참 또한 이어졌다”고 했다.
하 박사는 “70~80년대를 이끌었던 김창인 목사의 북한선교는 그 이후 많은 부침을 겪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사실은 두 가지가 남아 있다”며 “첫째는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복음의 불모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김창인 목사가 외쳤던 북한선교가 지금도 유효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둘째는 북한선교는 한국교회의 숙명의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라며 “김창인 목사의 북한선교가 90년대 이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북한선교의 중요성이 줄어들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한국교회가 민족적으로 풀어야 할 민족화해와 통일의 문제이며, 세계적으로 해결해야 할 평화의 문제이고, 선교적으로는 복음을 전해야 할 복음전파의 문제”라고 했다.
한편, 이어서 손동신 박사(백석대)가 ‘로잔운동 관점에서 본 위그노’, 마민호 박사(한동대)가 박사가 ‘필요분석에 의한 한국 BAM 훈련에 관한 연구’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