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즈베리대학교 류응렬 목사
애즈베리대학교 휴즈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이 기도하던 모습 ©류응렬 목사 페이스북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가 역사신학자로 랭커스터바이블칼리지(Lancaster Bible College)의 교수인 마크 드레이퍼(Mark Draper) 박사가 ‘부흥’(revival)과 관련해 쓴 글을 27일(현지 시간) 소개했다.

드레이퍼 박사는 이 글에서 “교회 역사가로서 최근 애즈베리대학교에서 끝난 부흥회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며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어떤 사람들은 부흥을 조심스럽게 격려하면서 이것이 열매를 맺을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명백한 반인종주의적 메시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격하하거나, ‘감정주의’와 설교 부족에 대한 전형적인 비난도 있었다고.

드레이퍼 박사는 그러면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첫 대각성 운동이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부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여러 글을 썼다”며 “그는 또한 진정한 부흥과 거짓 영성의 차이점을 분명히 했다”고 했다.

이어 “만약 우리가 완벽한 부흥이나 우리의 특정 기준에 맞는 완벽한 부흥가를 찾는다면, 부흥의 역사는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며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신다”고 했다.

드레이퍼 박사에 따르면 18세기 초 첫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동안, 복음주의 운동은 순회 설교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 의해 필라델피아 등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을 통해 그런 휫필드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때문에 휫필드가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지 못 하고 거리로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드레이퍼 박사는 전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동료 성직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드레이퍼 박사는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기준으로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을 판단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프리카 노예를 소유한 것을 결코 회개하지 않았고, 휫필드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짓기 위해 노예를 사용한 것을 결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나 그렇게 비판할 경우, 휫필드가 필라델피아의 노예 시장 중 한 구역에서 설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기독교를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이 부흥기 때였음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에드워즈는 인종에 기반한 노예제의 죄를 볼 수 없었지만, 조나단 에드워즈 주니어 등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 에드워즈와 함께 공부한 뉴잉글랜드의 젊은이들은 계속해서 노예제에 반대했다”며 “에드워드의 또 다른 학생인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는 제헌의회에 노예제를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고 했다.

또한 드레이퍼 박사에 따르면 19세기 전반에 걸쳐 두 번째 대각성 운동으로 알려진 일련의 부흥 운동이 있었을 때도, 일부 부정적인 요소들이 발견되긴 했지만, “19세기 부흥운동은 금주 운동, 주일학교 운동, 여성의 권리 등을 탄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경제 침체 후 월스트리트에서 1857~58년, 사업가들의 부흥으로 알려진 부흥이 일어났다. 이러한 부흥은 미국의 부분적 긴장과 함께 열광적으로 나타났다”며 “기독교인들은 부흥이 나라를 치유하기를 바랐고, 노예 제도가 너무 분열적이라는 이유로 예배 중에 언급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했다.

드레이퍼 박사는 “물론 이러한 부흥이 미국을 치유하지는 못했지만, 성결운동이 주류 복음주의에 영향을 주고 사회 개혁의 진척과 교단들의 협력이 일어난 것은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이었다”며 “남북전쟁 동안 부흥은 연합군과 남부군 진영 모두에서 정기적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그는 “19세기의 모든 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인종 차별이나 노예 제도를 집단적으로 회개하지 않았으며 일부 반대론자들에게는 이로 인해 부흥 운동은 실패한 것이었다”며 “그들이 그러한 유형의 회개로 인도했다면 미국은 더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4년 간의 유혈사태 끝에 1867년 뉴저지주 바인랜드에서 성결 운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드레이퍼 박사는 “부흥 운동의 역사는 부흥이 모든 죄를 근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번 (애즈베리대학교 등에서의) 부흥을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개인과 국가의 죄를 회개하는 데 이르도록 신중히 기도해야 할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의 목록이 근절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드레이퍼 박사는 “역사와 성경이 우리의 길잡이가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부흥을 한 세대 동안 어떻게 사용하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며 “하나님의 방법은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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