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길 교수
민성길 명예교수

히피운동의 결말이 어떠하였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것은 성혁명이 어떤 식으로 막아질 수 있는지에 대해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1960년대 기승을 부리던 히피운동은 1970년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히피의 수도로 간주되던 산프란시스코 하이트-애슈버리지역은 1967년 말 이미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평화와 자유 그리고 프리섹스”이라는 선전에 이끌려 수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지만, “사랑의 여름” 행사는 혼돈으로 끝났다. 축제 동안 인구과밀과 범죄와 프리섹스와 비위생적 상황, 그리고 특히 약물중독에 따른 폭력범죄와 성범죄(강간)가 문제 되었다. 프리섹스를 기대하고 무작정 집을 떠났던 청소년들은 거지가 되었고, 영양부족 상태에서 성병과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고통받았다.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돈도 떨어졌다. 도시는 쓰레기로 뒤덮이고, 일반 주민들도 떠났다. 1968년 40만명 이상이 모였던 우드스턱은 상황이 더 심각하였다. 무작정 모여든 젊은이들이 벌판에 수일간 노숙하면서 굉음의 음악과 술, 마약, 누디티, 프리섹스를 즐기는 통에 현장은 난장판이 되었고, 그 후유증도 심각하였다.

술(마약)과 섹스에는 폭력(죽음)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1969년 히피 구루 중의 한 사람이었던 뮤지션이었던 찰스 맨슨과 그 일당이 마약에 취해, 여배우 샤론 테이트과 그 친지들을 집단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히피에 대한 경각심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1970년 알타몬트 음악축제 때는 경비를 맡았던 오토바이족의 한사람이 약물에 취해, 롤링스톤즈가 연주하는 동안, 이유 없이 한 참가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월남전이 1970년 이래 잦아들다가 1975년에 종전하였다. 히피들은 더 이상 모여 반전운동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히피들도 나이가 들었다. 히피들은 히피운동의 인본주의적이고 낙관적인 이상주의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성숙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이 어떻게 끝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집으로, 그리고 정상적 직업을 찾아, 돌아갔다.

돌이켜, 히피문화의 철학-사상적 근원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그런 근원 이론 중에는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 또는 견유주의(cynicism), 인도의 힌두교-불교의 전통, 신이교주의(neo-paganism), 특히 섹스매직의 신이교 Wicca와 Thelema(69회 칼럼 참조).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 싸이키델리즘(다음 칼럼에서 자세히 설명 예정) 등이 있다. 전체적으로 이들 사상은 반기독교적, 이교적 내지 범신론적 영성을 나타낸다고 평가된다. 심지어 아시시의 프란시스, 초월주의적 생태주의자 헨리 소로우, 심지어 ⌜반지의 제왕⌟을 쓴 J. R. Tolkien의 영향도 발견된다고 한다.

비슷한 청년운동으로 19세기 말 독일에서 유행한 반더보겔 운동(Wandevogel movement)의 영향도 거론된다. 이는 청년들이 급속한 도시문화를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을 이루어, 야외활동 또는 도보로 여행하면서 전통 음악을 노래하며 자연과 영적 인생을 토론하는 문화였다. 이런 문화를 독일이민이 미국으로 가져와 ”자연으로 돌아가기“라는 대안적 삶을 시범하였다는 가설이 있다. (작가 헤르만 헤세가 반더보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히피들은 헤세의 1930년대 소설들이 집 떠남(방랑)과 마약과 프리섹스의 세계를 묘사하였다 하여, 헤세를 자신들의 구루 중 한 사람으로 존경하였다. 헤세에 대해서는 81회 칼럼에서 소개 예정)

히피 운동은 혼돈과 질병과 폭력과 죽음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문화는 사회의 여러 문화영역에 후유증을 남겼다. 프리섹스, 동성애에 대한 관용, 급진적 환경운동, 형식주의(formality)의 완화, 히피(캐주얼)패션, 채식주의,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 증가 등등이 그 유산들이다. 히피세대의 자식들인 X-세대는 히피문화의 직접적 피해자들이라 할 수 있다. X-세대는 어렸을 때 집에 와도 부모가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아 스스로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야 했는데, 그래서 “열쇠 세대“(latchkey generation)라 한다. 그들은, 부모의 부재로 훈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자랐다. 그들은 대체로 게으르고 냉소적이고 불평이 많았다. 그들은 펑크나 헤미메탈 같은 음악이나 비디오게임 등에 빠져 성장하였다.

당시 기독교도 미국을 휩쓸었던 청년들의 저항적 반문화 운동에 대해 의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크리스천은 히피운동을 말세의 징조로 보았다. 히피문화에 대한 신학적 비판도 나왔다. 즉 히피문화는 1910년대 이래 우세해진 인본주의 철학, 내지 이성주의(rationalism)에 기원한다는 것이었다. 인본주의나 이성주의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자신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보는, 또한 자신을 통합의 중심으로 생각하여 모든 지식과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이성적인 체계를 구축하려는 사상이다”. 그런 사상에 기초한 프리섹스 사상은 사드 후작이 대표격인 18세기 계몽주의적 성해방 사상과 같다고 본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신학이나 해방신학은 히피문화를 옹호하였다.

한편 60년대 청년문화는 당시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복음이며, 무엇이 진정한 공동체적 사랑인가 등등, 내면과 신앙을 성찰하도록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 말에, 청년들 사이에 이전의 은사운동에 이어 복음주의적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 일어났다. 그런 청년들은 자신들을 예수사람(Jesus people)이라 불렀다, 그들은 성경읽기, 기도, 방언, 사랑, 나눔, 영적 기쁨, 공동체 정신, 초대교회의 성령체험 등등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히피와 달리 프리섹스와 마약을 거부하며, 직장을 가지고 남을 돕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으며, 히피들이 안정된 생할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큰 집회도 열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CCC(Campus Crusade for Christ)가 주최한 Explo ‘72가 있다. 개최장소였던 달라스에, 10만명 이상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런 모임에서 복음주의 신앙이 훈련되고 세계복음화가 외쳐졌다. 이즈음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이 발전하였다. 이 청년들이 성장하여 이후 목사가 되거나, 반낙태운동, 가족 가치 회복 운동, 성중독자 회복 운동 등,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타락과 혼돈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총과 희망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지금 우리는 한국 사회에 빈기독교적 히피문화와 이교적 프리섹스 문화가 밀려오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새삼 다음 세대를 위해 복음주의 신앙을 지켜야 하는 사명을 갖는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민성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