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 언론에서 기독교의 부정적인 부분을 많이 다룹니다. 그 보도된 내용을 보면 기독교가 반성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질타에 대해 겸허히 수용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매도되거나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동성애 문제가 그러합니다. 오늘날 동성애를 지지하는 세속적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만으로도 모욕을 당하거나 혐오를 당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최근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께서 차별금지법 반대 1인 시위를 한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 소위 진보주의자들 역시 친동성애적 주장을 펼칩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러합니다. -> “기독교 신앙은 기득권이고, 소수의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한다.”
그런데 과연 이들의 주장이 맞을까요? 진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기득권이 아니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섬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또한 소수의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전통과 교리와 신앙에 있어서 동성애는 명백하게 ‘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혐오와 차별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알면서도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그러므로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말합니다. 동성애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유난히 동성애 문제를 가지고 프레임을 짭니다. 그 결과 기독교야말로 약자가 되었고,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음 3가지의 상황을 숙지해야 합니다.
첫째, 동성애는 소수자는 맞지만, 약자는 아닙니다. 작금의 사회적 분위기는 동성애자들에게 특권 의식이 자리잡혀 있고, 자신들 스스로도 특별함을 느낍니다. 그 근거는 유발 하라리,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등의 지식인들도 동성애자이고, 천재 중에 동성애자가 많다는 사회적 이미지가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각종 인권단체와 정치권과 연계되어 동성애는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동성애 문제가 합법화되면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교분리는 사실상 끝이 납니다. 더군다나 반대 세력의 입에 재갈이 물리면서, 동성애를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초중고 시절, 동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친밀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동성애로 굳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사회가 만들어지면 동성애자들이 특권을 누리며 보편적 가치에 있던 이들이 역차별을 당하게 됩니다.
정말 양심이 있는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약자와 소수자는 누구일까요? 그들은 바로 ‘탈동성애자’들입니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라고 소리칩니다. 그래놓고 그들은 정작 탈동성애자들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친동성애 집단이 탈동성애자들에게 행하는 폭력성은 가히 말로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탈동성애자들은 소수이나 존재합니다. 교회는 동성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다시 회복한 탈동성애자들 공동체를 품고 지지하고 보호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칙에 부합합니다.
둘째, 동성애를 찬성하는 소위 진보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포용이나 사랑을 닮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전통적 가정을 ‘해체’하는 데에 있습니다. 좌경화된 관점에서 가정이란 가부장적 억압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가정 해체에 가장 크나큰 걸림돌이 기독교와 성경입니다. 따라서 전세계 좌파 투쟁의 핵심은 기독교 성경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기독교인을 혐오주의자로 몰아 코너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가 혐오와 차별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직장에서 술자리를 거부하는 청년 그리스도인 직장인들, 세상의 편법과 방식으로 출세하기를 거부하며 정직히 사업하는 그리스도인 자영업자들, 주일 성수를 위해 주일날 가게 문을 닫는 그리스도인 사장님들, 혼전순결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연애관을 거부하며 청년의 때에 묵묵히 인내하는 그리스도인 청년들… 이들이 유별난 존재들로 조롱받고, 차별받는 약자들이 되어 있습니다. 신앙 전통 안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차별과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동성애라는 ‘죄’를 ‘죄’라고 말하는 정직한 설교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정말 기득권을 차지한 동성애 지지자들이 기독교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있습니다. 순수를 가장한 동성애 찬성론자들은 대형교회 목사이면 기득권이고, 거기에 동성애를 반대하면 꼰대 목사로 혐오합니다.
셋째, 동성애를 찬성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퀴어신학’은 성경의 왜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동성애자 포용한답시고 기독교와 성경 해체에 앞장서는 소위 진보적 기독교인의 음모에 대해 소름이 돋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과연 복음주의 목회자가 동성애를 찬성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목회자는 이것도 저것도 좋다고 생각하는 상대주의자, 혼합주의자, 처세주의자, 상황주의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복음에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이와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무분별하게 포용하는 이는 아닙니다. 포용만 있고 교리가 없는 교회는 결국 쇠퇴하고 망가집니다.
종종 동성애 문제는 사소한 견해 차이에 불과하고,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 문제는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조, 타락, 구원의 핵심적인 연결고리 안에 동성애 문제가 속해 있습니다. 창조 교리를 부인하면 전 교리가 무력화됩니다.
세상 풍조가 나날이 변하여도, 신학의 영원한 기준(norm)은 성경입니다. 대개 성경에 대해 무지하거나, 성경을 중시하지 않거나, 성경을 참고 사항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이 동성애를 지지합니다. 동성애 지지 신학자와 목회자는 본인들이 과연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인인지 자문해야 합니다. 지금 퀴어신학이라는 비뚤어진 성경 해석으로 인해 현실 세계에 놓인 수 많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차별과 혐오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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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