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인가요, 아니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인가요? 또는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고 싶은 마음인가요, 아니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인가요? 우리는 종종 예배를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지키는 종교적 의무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참된 예배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그 시간이 오히려 우리를 얽매는 율법주의가 되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참된 가치와 목적에 대해 계속 강조합니다. 그는 선교 여행 중에 쓴 이 편지에서 예배의 참된 기쁨과 자유함의 본질을 끌어내리는 율법주의적인 예식과 맞서야 했습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보듯 이 문제가 두드러진 예배 공동체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지금의 터키 남부인 갈라디아 지방 여러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남아 있는 사도 바울의 편지 중 가장 초기의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할례나 음식에 대한 율법 등 유대의 예배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대체되었음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5-7)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문제들로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즉 복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지만, 보다 나은 종교적 체험을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자신들의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갈 4:10) 이러한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Judaizers)’은 유대교의 종교적 율법, 즉 의식 절차나 할례와 관련된 것을 지키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갈 6:12)
이들은 믿음의 핵심이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들과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으로 인해 참된 복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예배가 종교적 의무를 지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음을 저버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했다가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었고,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살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이러한 율법적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복음의 본질적인 말씀에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를 수 있으며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인간의 의에 의지하는 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또 다른 유대인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은혜롭게 주신 구속과 용서의 선물을 거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배자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을 좇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갈 5장). 참된 믿음이란 단지 ‘쉬운’ 믿음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우리의 열정과 헌신이 없이도 단순히 복음에 능력이 있다고만 믿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참된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받은 것이기에 은혜의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율법적인 노력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참된 교회와 예배 공동체의 목적과 가치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보혈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기쁨과 자유함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갈 1:4-5)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영향을 줍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이를 염두에 둔 바울은 믿음과 유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대조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18-24)
또 율법주의와 아브라함의 후계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역시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3-24)
이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인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갈 3:25). 바울의 말처럼 예배자들은 더 이상 어린아이나 종으로 사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귀중한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8-29)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1-2) 또한 이제는 성령 안에서 참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의식과 제사보다는 우리가 정말 새롭게 예전의 삶과 다른 사람으로 변화했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예배의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참된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은 뛰어난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0-12)
둘째, 누군가의 회심에 대해 들었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 1:23-24)
셋째, 균형 잡힌 예배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넷째, 참된 예배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다섯째, 율법주의는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고, 나아가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분리시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여섯째, 참된 예배자는 겸손과 신실한 사람입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갈 6:13)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은 향후 2천 년간 이어지는 교회사의 방향을 정하고 결정한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그 논의의 주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유대교 의식에 따라 살지 않고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오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유대교의 관습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1세기 말경,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방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세기 말에 유대교 관습을 행하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소수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교회의 변두리로 내몰렸고 심지어 이단으로 간주 되기도 했습니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1세기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예배 드릴 자유를 얻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진 예배의 자유를 감사하며 이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예배는 우리 예배자들이 함께 모여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비롯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드림이 기쁨이 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쁨과 자유함으로 온전히 누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3-14)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찬양과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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