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지면서 점점 각박해지고 서로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다반사로 나타난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그 자리에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과 맺어야 할 관계 자리에 개, 돼지, 염소, 곤충, 파충류, 물고기를 놓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 자리에 우상을 대치하는 태도와 원리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
십계명이 정확하게 규정한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 두 종류의 관계는 심각하게 왜곡되고 말았다.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 자리에 우상을 놓았다면, 이웃과의 관계 자리에 하나님께서 뜻하지 않은 왜곡된 것들로 채워 놓았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려동물’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반려”라는 용어부터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려”는 ‘짝 반(伴)’에 ‘짝 려(侶)’를 사용한 한자로서, ‘단짝’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반려’에 해당하는 한자를 잘 관찰하면 부수가 모두 ‘사람 인(人)’이라는 점이 아주 흥미롭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아담(남자)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음으로 ‘여자를 반려자(짝)’로 주셨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로 다른 ‘남자’를 짝으로 주지 않으셨다. 또한 다른 동물을 짝으로 주지도 않으셨다. 또 말라기 말씀처럼 하나님은 영이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여자가 아닌, 오로지 한 여자만 짝으로 만들어 주셨다(말 2:15). 이런 하나님의 행위는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이 짝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그 외의 것들은 결코 짝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외의 것으로 짝을 삼는다면 그것은 우상이요, 범죄로 간주될 뿐이다.
그런데 상당수 사람들은(기독교인들까지도) 매스컴이 떠드는 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여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충격적인 사실은 영화나 만화, 혹은 TV 방송이 동물 의인화 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동물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영혼이 있는 것처럼 사람 목소리를 더빙하거나, 혹은 방송국 나레이터가 동물의 본능적인 행동을 인간처럼 높은 지능에 의한 행동한 것처럼 묘사하여 웃음과 슬픔을 자아내도록 한다. 이를 위해 음악과 다양한 영상 기법으로 포장하면,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는 물론이고 물고기나 파충류까지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재미있게 보지만 성경적으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나 이렇게 동물들을 인간들과 동등한 존재처럼 생각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동물을 “애완”으로 여기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애완”(愛玩)에 해당하는 사전적 의미는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이다. 쉽게 말한다면 동물을 일종의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태도는 말 못 하는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이거나, 싫증 나면 유기시키는 양태로 나타난다. 이 또한 동물을 ‘반려’로 여기는 태도 못지않게 심각한 극단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적절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말 못 하는 동물이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 가운데 창조하신 피조물임을 염두에 두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람의 생명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들도 귀한 생명이므로 함부로 학대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로, 사람은 피조물들을 바르게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 1:28의 명령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다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 명령은 제대로 수행되고 있지 않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처럼 모든 피조물들은 신음하며 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통해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한다(롬 8:19-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피조물들의 탄식이 그치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로, 사람은 피조물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가장 위대한 피조물은 사람이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말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됐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들과 관계를 맺도록 구별된 존재임을 가르친다. 이 관계 자리에 다른 것으로 대치한다는 것은 스스로 짐승의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을 고통스럽다고 하여 그 자리에 다른 짐승이나 물건으로 채우려 하는 것은 우상숭배일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키우는 개나 고양이나 기타 짐승들이 비록 사랑스럽게 여겨진다고 해도 자신을 엄마나 아빠나 오빠나 형, 더 나아가 짐승보다 낮은 위치를 자신을 ‘집사’라고 부르는 일은 장난이라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죄는 이렇게 장난삼아 가볍게 시작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피조물들을 바르게 다스려야 한다.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너무 지나치게 장난감 취급을 해서도 안 된다. 신앙은 균형이다. 지나친 것은 악으로 향하게 된다(마 5:37). 그리스도인들은 짐승들을 사랑하고 잘 보존하되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말 못 하는 동물이라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 모든 동물들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충성되게 다스리고 돌보는 청지기일 뿐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카도쉬아카데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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